슬리퍼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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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와 교회
  • 김홍우 목사(방주교회)
  • 승인 2021.06.2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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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우 목사(방주교회)의 산골어부 에세이

“교회에 올 적에는 슬리퍼를 끌고 오지 마라.”

벌써 한 10년 전 즈음에 슬리퍼를 끌고 와서 벗어놓고 예배에 참석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점잖게 훈계를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다시 슬리퍼를 끌고 오는 아이들은 없어졌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올 때 슬리퍼를 끌고 나오면 안 되는 걸까.’

우리 정서 속에 ‘슬리퍼’라고 하는 것은 그저 집안용이고 외출용이 아니며 사람이 사람을 대면할 때에 갖추어야 할 예(禮) 차원에서도 바르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들이 있어서 슬리퍼를 신고 어른 앞에 서지 않고 멀리 외출을 나가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목회자 된 이가 하나님 앞에 예배와 기도를 하러 나가면서 슬리퍼를 신고 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불편을 주며 매우 마뜩잖은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저도 어릴 적부터 검정고무신을 신고는 교회에 여러 번 다녔을지라도 슬리퍼를 신고 가본 기억은 없습니다. 또 운동화마저도 뒤를 꺾어서 슬리퍼처럼 신고 가는 것도 당시 교회 속장님이었던 어머니는 엄격히 금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예쁜 운동화를 찾아 닦고 털고 똑바로 신고 가는 것이 교회에 나가는 모양과 모습으로서 정석이었던 것이지요.

새벽기도를 하러 교회에 나가는 것도 역시 그러하여야 하겠지요. 그런데 참 죄송하게도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난 5~6년을 슬리퍼를 신고 새벽기도를 나갔고 또 인도했습니다. 문제는 오랜 기간 그렇게 하면서 그 자체를 거의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변명을 하자면 교회의 사택에서 지내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교회 본당 건물과 연결된 사택에서 출입문을 열고 나오면 약 20m 정도를 걸으면 교회 현관이고 바로 들어갈 수 있기에 교회도 ‘우리 집 마당’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정당한 변명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목회자이니까 얼굴의 면도 상태 등을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길어있다 싶으면 사무실에서라도 전기면도기를 씁니다. 얼굴 모습은 그렇게 ‘경건’에 맞추면서도 기도를 마치고 나오다 보면 다른 기도하러 오신 성도 분들의 구두와 나란히 있는 나의 슬리퍼, 목사의 슬리퍼.

그러나 이렇게 근거리에서 나오면서도 그렇게 신발까지 다 갖춰야 하는 것인지 하는 의구심은 여전할 때가 많아서 이렇게 글로 정리하여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좀 더 갖추고 좀 더 부지런 하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기도할 것을 말씀하지요. 그리고 이 ‘신령과 진정’은 쉽게 말해서 ‘몸과 마음을 다하는 정성’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이든 먼 거리이든 슬리퍼를 신고 교회에 기도, 예배, 찬양하러 나가는 것은 ‘정성’이 실린 모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냥 대충-’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예를 갖춘다고 하는 것은 곧 작은 것이라도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지요. 무릎을 꿇는다는 것, 옷을 갖추어 입는다는 것 식사예절 및 생활 예절 등에서 그러합니다. 기도하러 나온 이가 슬리퍼를 신었는지 구두를 신었는지에 관심을 두시는 하나님이시라기보다는 그 ‘정성의 마음’을 살피시는 시선과 관심에 ‘슬리퍼의 착용’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또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슬리퍼’ 그 자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잘못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좀 더 정성의 마음으로 관심을 기울여 하나님 앞에 더욱 예를 갖추고 혹 부족하거나 덕스럽지 못한 것이 없는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이제부터는 꼭 신발을 마땅한 것으로 챙겨 신고 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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