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보다 둘, 둘보다 셋이 의지하는 인간관계 중요성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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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보다 둘, 둘보다 셋이 의지하는 인간관계 중요성 강조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1.03.16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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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 교수의 전도서이야기(10) -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면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결핍을 채우려 달리고 열등감을 해소하려 일하며, 힘과 돈을 얻으려 싸우지만, 막상 무언가를 손에 쥐면 자기가 원했던 것이 그게 아닌 듯한 허전함. 바로 전도자가 헤벨이라 부른 그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묘사하는 전도자의 필치가 통렬합니다: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 도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전 4:5~6)

많이 벌고 많이 소유했지만 왜 사는지 모르겠고 수고로운 자기 인생이 “바람을 잡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가진 것은 적어도 마음이 평온한 사람보다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몸을 부지런히 놀린다 해도 자신의 인생을 방관하는 삶입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사실은 “팔짱을 끼고” 살 수 있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지만 속은 텅 빈 사람. 남들은 내 겉모습을 부러워하는 데 내 속은 다 썩어 있는… 오늘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 정직하게 살펴보면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바쁘긴 한데 무엇을 위해 바쁜지, 내가 하는 일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인지 자신이 없다면 멈추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도자가 8절에서 “해 아래 헛된 것”이라 묘사하는 사람, 즉 물려줄 데도 없는데 죽어라 일하는 사람, 가질 만큼 가졌는데도 누리지 못하고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으로 인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의 사는 모습이 특별히 애처로웠던지 전도자는 자주 사용하는 “이것도 헛되니”에 덧붙여 “불행한 노고”라는 슬픈 호칭까지 더해줍니다. 불행한 노고라니, 얼마나 슬픕니까.

어떻게 해야 이 헛됨과 불행을 피할 수 있을까요. 전도자는 논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수고 끝에 남은 것 없는 슬픈 인생” 이야기 후에 동반자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4:9) 원문의 뜻을 잘 전달하기로는 『새번역』의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가 좋습니다. 9절만 보면 두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뜻에서 윈-윈 관계에 있는 파트너입니다. 1 더하기 1을 2 이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전도자는 한쪽이 넘어지면 붙들어 일으켜주는 존재(10절), 함께 누워 체온을 나누는 사람(11절), 버거운 적에게 함께 맞서 싸울 수 있는 동지(12절)로 파트너의 의미를 확대한 뒤 세 겹으로 꼰 밧줄에 빗대어 동반자의 소중함을 각인시킵니다.

이러한 동반 관계의 정점은 물론 배우자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10) 그러나 전도서 4장에서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며 서로 도울 수 있는 그런 동반자를 얻고 동반자가 되어 주는 속에서 불행을 이겨낼 힘을 얻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내 삶에 허락하신 인간관계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귐의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로 이끄실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니까요(3:11).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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