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은 인명피해와 사회적 혼란 그리고 ‘배타적 이기주의’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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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은 인명피해와 사회적 혼란 그리고 ‘배타적 이기주의’ 초래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1.02.23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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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48) 기독교와 사회문제 : 전염병(3)

로마시대 발생한 두 번째 역병은 기독교를 심하게 탄압했던 데시우스(Trajan Decius, 249~251)가 황제가 되던 249년부터 262년까지, 간헐적으로는 270년까지 유행했던 키프리아누스 역병이었다. 에디오피아에서 발병한 이 역병은 251년 창궐하기 시작하였고 252년에는 카르타고로 확산되었다. 이 병은 사람과 사람 간의 접촉이나 의복을 통하여 감염되어 빠르게 이동하여, 그리스를 거쳐 시리아로, 그리고 로마로 전파되었다. 

262년까지 계속된 이때의 전염병은 도시와 농촌으로까지 파급되었는데, 증상은 금식한 구토, 설사, 고열, 피부 발진, 인후통, 그리고 손과 발의 괴저(壞疽, 손발이 썩음) 현상이었다. 이때의 역병을 홍역이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스타아코폴로스(D. Ch. Stathakopoulos)같은 이는 천연두로, 역사가인 카일 하퍼(Kyle Harper)는 유행성 인플루엔자 혹은 에볼라 바이러스와 같은 바이러스성 출혈열로 보기도 한다.

이때의 유행병을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Cyprianus, 200년?~258)가 자신의 설교, ‘죽음을 면치 못함에 대하여’(De mortalitate)에서 병세와 사회상황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이 때의 역병이 인명의 피해와 더불어 심각한 사회 현실을 초래하였다고 기록했다. 역병은 천연두나 홍역을 경험해 보지 못한 지역에서는 면역력의 부재로 피해가 컸고 치사율도 높았다. 결과적으로 인적 손실은 식량생산에 영향을 주어 식량부족 현실을 초래했다.

이 병이 정점에 달했을 때 수도 로마에서만 하루에 5천명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다고 맥닐은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인구의 3분지 2가 죽음을 맞았을 것으로 보우크(A. Boak)는 추정했다. 이때의 역병에 대해서는 기독교 관련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데, 키프리아누스는,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이 전염병과 흑사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썼다. 몇 년 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 설교에서 “청천벽력처럼 그 어떤 재앙보다도 공포스러운 존재인 이 질병이 임했다”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또 『키프리아누스 일대기』를 쓴  폰티누스는 당시의 전염병에 대해 기록하면서, “무서운 전염병이 발생하여 그 놀라운 파괴력이 집집마다 파고들어가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죽어간다. 모두가 두려워 떨며 도망하여 전염을 피하려 한다”고 썼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오스는, “전례 없는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했다. 로마가 전쟁에서 패하면서 재난은 가중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와 시골에서 죽어갔다. 한편으로는 물가가 너무 올라 양식을 사기 위해 재산을 다 팔고도 부족하여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거리에는 벌거벗은 시체들이 즐비하며 개에게 뜯기기도 하였다”고 썼다.

이런 전염병은 3가지 사회적 문제를 초래하였다. 첫째는 대량의 인명 피해였다. 거리의 즐비한 죽음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혼란이었다. 인구 감소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노동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식량 생산은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행정력은 제한되거나 마비되었고 사회적 혼란은 불가피했다. 셋째는 배타적 이기주의가 창궐했다는 점이다. 이 점 역시 사회적 혼란의 결과이지만 우선 자신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남을 배려하는 사랑은 식어지고 이기적 행위가 당연시되었다.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면 될수록 이기주의 또한 심화되고 때로는 인간성을 파괴하기도 한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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