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3년 7월 1일부터 총 5년 6개월간 회의 1,163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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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년 7월 1일부터 총 5년 6개월간 회의 1,163회 열려
  • 장종현 목사
  • 승인 2021.01.2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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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현 목사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강해(4) 웨스트민스터 총회 스케치
장종현 총회장
장종현 총회장

왕군과 의회군이 대치해 있던 1643년 7월 1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개최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5년 6개월 22일 동안 1,163회 이상의 정규모임을 가졌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는 151명의 대표가 참석했는데, 처음 호명된 30명은 평신도 사정관들로 10명의 상원의원들과 20명의 하원의원들이었고, 나머지 121명은 각 지역에서 선출된 성직자들이었다.

선발된 대표들은 최고 수준의 학문성과 경건을 겸비한 성직자들이었다. 당시 성직자들의 절반 정도가 문자를 읽지 못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총회 대표들 중 85%는 학사, 석사(최종 학위)를 소지한 사람들이었다. 청년 때에 이 총회를 지켜보았던 청교도 목회자 리차드 백스터는 “총회의 대표들은 모두 학식이 뛰어나고 경건하며 능력 있는 목회자들로 사도시대 이후부터 이렇게 탁월한 성직자들이 모인 회의는 이전에 없었다”고 말했다.

151명의 대표들 명단 중에 25명은 한 번도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두 명은 총회 때에 세상을 떠났고, 다른 이들은 총회를 반대한 찰스 1세를 두려워했거나, 혹은 감독제도를 좋아했기에 참석치 않았다. 의회는 부족한 위원들을 채우기 위해, 21명의 위원들을 추가로 선정했다. 그러므로 전체 임명된 대표들은 스코틀랜드로부터 온 2명을 포함하여 32명의 평신도 사정관들, 스코틀랜드로부터 온 4명을 포함하여 142명의 성직자들이다. 스코틀랜드의 대표들은 발언권은 있었으나 투표권은 없었다.

총회 첫날에는 69명만 참석했다. 대개 평소 회의 참석자는 60명에서 80명 사이였다. 출판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102명의 성직자 이름이 나오지만, 여러 사람들은 꾸준히 불참했다. 성직자 대표 가운데 적어도 80%는 지역 교회를 돌보는 목회자들이기에 5년간에 걸친 긴 회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기는 힘들었다.

회의 중에 자주 발언한 성직자는 12명 정도였고, 그중에서도 독립교회파의 대표인 토머스 굿윈은 초기 127차 회의에서 무려 357회 발언을 해서 단언 1위였다. 많은 이들이 학식과 능력은 있었지만, 듣고 생각하고 투표하는 것에 만족했다. 세 명의 속기사들은 투표할 권한이 없었다. 이들은 회의 중의 제안들과 토론 과정 그리고 투표 결과를 기록했다.

웨스트민스터총회는 정도의 차는 있었지만, 대표들 모두가 개혁주의신학을 따르고 있었기에 교리적인 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교회 조직과 정치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리어 그에 관한 열띤 토론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총회를 구성했던 이들을 교파별로는 넷으로 나눌 수 있다. 절대 다수의 숫자로 총회를 주도했던 장로교파 외에 소수의 극단적인 영국 교회파와 독립교회파, 그리고 에라스투스파도 있었다. 이 파는 16세기 스위스 출신의 신학자 토머스 에라스투스의 주장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는 국가를 통해 권징이 시행되어야 하고, 교회는 국가의 권위 아래 감독을 받는 국가의 부속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리하면, 웨스트민스터총회는 한 단일 교파의 총회가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개혁주의 안에서 교회조직 체제에 대해 생각이 다른 대표들이 함께 만들 고백이다. 그리고 영국교회가 주최가 되어 소집한 총회가 아니고, 교회 문제에 모든 결정권을 가진 영국 의회가 성직자들을 소집하여 정한 안건에 대해 권고안을 내도록 요청한 회의다. 총회가 제출한 권고안은 최종이 아니었다.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한은 의회가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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