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안
인문주의 이름 바디안(J. Vadianus, 1484~1551)은 본명 요아힘 폰 바트(Joachim von Watt)의 개명이었다. 바디안은 1484년 11월 29일 성 갈렌(St. Gallen)에서 포목상을 하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성 갈렌에서 라틴어 학교를 마친 그는 1501년 말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바디안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는데, 그가 라틴어 문화와 인문주의에 매료되었음을 알게 된다. 바디안은 빈대학교에서 츠빙글리를 같은 학생으로 만났다.
바디안은 빈대학교에서 1504년 문학사를 얻었다. 흑사병이 일자 그는 1506년부터 1507년까지 대학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케르텐의 필라라는 지역으로 피신했는데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음악 수업도 듣고, 베네딕투스 수도회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탈리아의 트리엔트, 베니스, 파두아로 수학여행을 다녔고, 다시 빈대학교로 돌아와 1508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고향 성 갈렌으로 돌아갔다. 1512년부터 바디안은 빈대학교에서 수사학과 시학을 가르쳤다. 천부적으로 문학성이 뛰어나고 탁월한 웅변가였던 바디안은 1514년 3월 12일 린츠에서 황제 막스밀리안 1세가 수여하는 계관 시인(Poeta laureatus)에 올랐다. 1515년 빈에 모인 국제 제후대회에서 바디안은 폴란드 왕을 위한 인상 깊은 환영사를 했다. 1516년 그는 빈대학교의 수사학과 시학의 교수와 학장에, 1516년/1517년 겨울학기에는 총장이 되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그는 바쁜 중에도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그의 학구열은 식을 줄 몰랐는데, 의학과 자연과학에 특히 지리와 역사학에 심취하였고, 그는 지구가 볼처럼 둥글다고 주장했다. 1517년 그는 의학박사가 되었고, 수학자, 천문학자, 의학자가 그가 사랑하는 선생들이었다. 1518년 고향 성 갈렌으로 돌아온 그는 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성 갈렌 시는 그를 자문위원과 의사로 위촉했는데, 이 일을 바디안은 진지하게 수행하였다. 1519년 그는 35살의 나이로 결혼하였는데, 상대는 재세례파 야콥 그레벨의 딸이며, 콘라드 그레벨의 누이 마르타 그레벨(Martha Grebel)였다. 바디안은 성 갈렌에 살며 인문주의를 후원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1522년 여름 그는 바젤을 방문하여 인문주의자 공동체와 돈독한 인연을 맺었으며, 그곳에서 당대 최고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만났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 그는 바로 종교개혁에 동참하였는데 루터의 글들을 직접 읽고 츠빙글리와의 우정을 통해서였다.
그의 종교개혁 동참은 츠빙글리에게 보낸 편지와 다른 글들을 볼 때, 1522년 그는 로마교황청과 교황의 수위권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1523년 바디안은 제2 취리히 토론과 1528년 베른 토론의 의장이 되어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인물로 무대에 등장하였다. 1524년 3월 바디안은 취리히 출판업자 프로샤우어와 함께 츠빙글리의 저서 『목자』가 출판되도록 힘을 보태었다. 1526년 바디안은 3년 임기의 성 갈렌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는데, 본격적으로 성 갈렌의 종교개혁을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이끌었다.
주도홍 교수의 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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