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신수설’ 확신한 찰스 1세, 청교도 의회와 충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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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신수설’ 확신한 찰스 1세, 청교도 의회와 충돌해
  • 장종현 목사
  • 승인 2020.12.29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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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현 목사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강해(1)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11월 3일에 의회가 헨리 8세와 그의 후계자(국왕)가 영국교회의 머리가 되는 ‘수장령(首長令)’을 통과시킴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그 출발점은 헨리 8세가 아들을 낳지 못한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교황으로부터 허락받고 연인인 앤 불린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또 그 동기가 종교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다 보니 영국교회의 개혁은 철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교회 내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요소가 상당히 남아 있었다. 헨리를 계승한 아들 에드워드 6세는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미신적 예식들을 폐지하고 예배를 좀 더 순순한 형태로 되돌렸다.

하지만 요절한 그를 이어 극단적 교황주의자인 이복누이 메리 1세가 즉위하므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 때보다 오히려 후퇴해 버렸다. 게다가 300명 이상의 개신교인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시키는 등 가혹한 탄압을 했다. 때문에 메리의 치세가 조금만 더 길었다면 영국에 개신교인의 씨는 말라 버렸을 것이다. 1558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했고, 그 이듬해인 1559년에 수장령과 공동기도서 통일령이 공포됐다. 엘리자베스의 의도는 국가 통합을 위해 교황주의자들과 개신교인들을 연합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동기도서의 내용은 로마 가톨릭 측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중재안은 에드워드 6세의 개혁안보다 훨씬 퇴보한 것이었다.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 ‘청교도’라는 용어는 엘리자베스 1세의 중재안에 불만을 가진 이들로서 영국교회가 비성경적이고 부패한 상황을 떠나 존 칼빈이 지도했던 제네바 교회의 모범을 따라 좀 더 정화되고 개혁되기를 추구하는 이들을 말한다. 또한 청교도 운동의 기간은 엘리자베스의 중재안이 공포된 1559년과 왕정복고 후 찰스 2세가 통일령을 공포한 1662년 사이의 한 세기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 말할 때 ‘청교도’ 시대는 17세기 말까지 계속된다. 그 용어가 가리키는 대상도 정직이나 파면을 당해 쫓겨난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국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신학적으로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는 이들 다수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모계 혈통의 권리에 따라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위를 제의 받고 큰 어려움이나 반대 없이 왕위에 올라 제임스 1세가 됐다. 제임스가 장로교 나라인 스코틀랜드에서 왔기 때문에 영국교회에 대한 장로교적 비판에 공감하고 있던 청교도들은 그의 즉위를 반겼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를 경험했던 제임스는 청교도가 왕정에 별로 이로운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감독들 편에 섰다. 모두 국교에 순응하도록 촉구하고 만약 순응하지 않으면 나라 밖으로 내몰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제임스와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청교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던 의회와 좋지 않던 관계에 있었던 데는 왕권신수설에 대한 두 왕의 확신도 한 몫 했다. 제임스는 기질상 문제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거나 어떤 것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이론적인 데 만족했던 데 반해 아들 찰스는 자신의 신념을 철저하게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찰스는 1652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재정적 필요 때문에 의회를 즉각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개회되자 의회는 당시에 시행 중이던 계획에 낭비가 많음을 깨닫고 경비를 승인하기보다는 사안들을 토의했으며, 특히 이전 보조금의 사용 방식을 토의하는데 열을 올렸다. 조금 더 지나서는 불평거리의 시정이 우선돼야 한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찰스는 자신이 소집했던 첫 의회를 서둘러 해산시켜 버렸다.

찰스가 왕권신수설에 기반을 둔 전제왕정을 이상으로 여겼던 반면, 당시 의회는 자신들의 의무가 전제왕권에 재정적 지원과 도덕적 지지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님을 이미 개닫고 있었다. 그들은 성직 중심주의와 교회의 견책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국교회가 왕정에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감독들(감독제도:최고의 성직 계급인 감독들에 의한 교회 운영 제도)을 자기가 결정한 정책의 집행자로 활용했던 찰스로서는 의회의 여러 가지 처사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왕과 의회가 그토록 상반된 입장에 있었으므로 찰스가 집권한 초기의 의회들이 모두 실패로 끝났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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