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의 인물 : 이성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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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의 인물 : 이성휘목사
  • 승인 2004.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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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철수하는 공산군에 학살 추정

평북 철산 출생의 이성휘목사는 명석한 두뇌로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직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신학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에 몸담은 교육가요 목회지도자다. 그는 교회탄압을 위해 급조한 북한 공산당의 전위조직인 기독교연맹의 창립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이며 교회의 종교성을 유지하는 등 신앙의 순결을 고수하다가 결국 한국전쟁 와중에 공산당에 학살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같은 순교사실이 알려지면서 1957년 그의 모교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은 강당에 ‘이성휘 박사 순교기념패’를 안치했다.

박사학위 취득후 귀국한 이성휘목사는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평양장로교신학교에서 교수에 취임하는 한편 서문밖교회의 목회자로 헌신했다. 놀라운 교회부흥을 경험한 이박사는 생각 밖으로 부족한 교역자 수급에 책임감을 느끼고 신학교 성장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당시 격동의 세월을 산 사람들 모두가 그랬듯이 이 박사는 일제시대의 신사참배와 싸워야 했다. 1928년 그의 귀국 이후 10년만에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해방과 더불어 그는 폐교조치됐던 신학교 문을 여는데 더욱 매진했고, 급기야 이북5도연합회를 구성하는 등 노력을 통해 침체됐던 북한교회를 다시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성장하는 신학교를 주목했던 공산당은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성’을 두고 이에 등록해야 할 것을 강요했다. 여기서 버틴 인물이 이성휘목사였다. 그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등록된 것을 또 등록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며 강양욱목사를 대동하고 기독교연맹을 조직한 북 공산당에 맞섰다. 그런 와중에 신학교 김인준 교장은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그는 기독교연맹과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성 등록을 거부하며 교장으로서 신학교를 지키다가 한국전쟁 중 퇴각하는 공산군의 대규모 학살 때 함께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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