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과 위기의 시대, 하나님을 향한 신비적 신앙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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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과 위기의 시대, 하나님을 향한 신비적 신앙 등장
  • 민경배 박사
  • 승인 2020.12.0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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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 박사에게 듣는 ‘코로나와 한국교회’ ⑨ - 이용도의 신비주의와 칼 바르트의 위기신학

1930년대 극심한 시련
1930년대는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극심한 시련기였다. 일본에서는 혁명에 가까운 군벌정치로 사상통제를 하고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2.26사건을 일으키며 조선총독을 두 번씩이나 지낸 내각총리대신 사이토 마코토 해군 대장과 몇몇 대신들을 살해하고, 심지어 신격시하던 천황의 원대복귀명령에도 한 때 불복한다.

한국에서는 시베리아, 만주, 일본으로 유민이 100만 넘어 흘러갔다. 거기서 공산당들이 이들을 죽이고 불태우고 뺏고 살을 벗긴다. 나라 안에서는 퇴폐, 허무, 불안, 공상이 휩쓸고 말초적 환락이 횡행하고, 더러는 경박한 마르크스주의에 흥분, 이 풍진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환난 극복의 신앙운동들
농업전문가였던 조민형 목사는 “한국을 육적으로 영적으로 구원할 사명을 가진 교회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나라는 영원히 소망이 끊어지고 만다. 이 민중은 사라져버리고 농촌은 멸망하고 여기 따라 교회도 자멸되고 말 것” 이라 경고한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적극신앙단, 최태 용의 복음주의, 유명화 백남주 황국주의 신령주의, 변성옥의 조선기독교회,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 단권주석, 김교신의 ‘성서조선’, NCC 사회신조, 이용도의 신비주의 등이다. 시대를 구하고자 하는 일련의 숨 가쁜 시도들이 줄선다.


이용도의 신비주의의 역사성
그런데 한국 최고의 지적 엘리트 기독교인인 김교신이 이용도에게 보인 태도가 눈길을 끈다. 1931년 정초인데 “금일 처음으로 이용도 목사의 전화를 받아 초대면이었으나 우리는 철편이 자석에 끌리는 듯했다”는 것이다. 쇳조각이 자석에 끌리는 듯 환난의 날에 치솟은 이용도! 그의 신비주의가 지녔던 시대적 파급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귀이다.

세상이 어렵고 끝장이 난 듯 앞이 안보일 때, 이용도는 예수님과의 신비적 일체를 그 신앙의 절정으로 보았다. 그리고 거기 한없는 사랑으로 매달렸다. 그의 신비주의 신앙은 역사적 현상이었다. 세상 다 그렇게 암초에 걸린 듯할 때, 다 잊고 끊고 오직 가슴 깊이 새겨진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따라 거기 거하는 순수한 사랑의 신앙, 십자가의 사랑으로 오신 우리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 그것 이외 바라는 것이 없었다. 교회가 사회변화의 도전에 신음하던 때에 어지러운 세상 보지 말고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라” 외치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처럼 33세에 하늘나라에 갔으면 했다. 그러더니 실제 33살에 “아름다운 내 고향 본향 삼고 거기 풍파 일지 않네” 찬송 소리 들으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년에 시련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가 속한 감리교가 그를 목사직에서 면직하고 장로교가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그의 시대적 신앙은 한국교회사의 빛나는 유산이다.


일본에서는 바르트신학
참 묘한 것은 이런 극단의 시련기에 일본교회는 바르트의 위기신학에 기운다. 하나님은 이 세상 것이 다 끝나는 위기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신학인데, 역사적 현상으로는 한국의 신비 주의와 같았다. 일본에서는 이 위기신학이 격동기 군벌 탄압의 피뢰침 신학이었다.


민경배 박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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