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편지는 츠빙글리와 재세례파의 논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르게는 재세례파의 삶의 양식과 정신세계에 대한 그림을 제공한다. 특히 츠빙글리는 그들 중 옥중에 갇힌 자들과 나눈 대화, 그들의 심문조서를 근거로 재세례파를 묘사했다.
1527년 8월, 1527년 9월 1일 편지를 쓰기 바로 얼마 전, 취리히, 베른, 그리고 종교개혁에 동참한 여타 지역들이 재세례파 처리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은 어떻게 재세례파를 대적하며, 경고하며, 처벌하며, 외국으로 추방할 것인지, 재범의 경우 처벌로서 물에 빠뜨려 죽게 할 것인지 다루었다. 이미 1527년 1월 7일 취리히에서 실시한 첫 번째 수장 사형자는 펠릭스 만츠(Felix Manz)였다.
콘라드 잠?
역사는 콘라드 잠(Conrad Sam, 1483~1533)을 제국의회가 위치한 도시 울름(Ulm)의 신학자요 종교개혁자로 일컫는다. 잠은 루터 출생과 같은 해 1483년 울름의 남서부 방향 도나우강이 흐르는 지방 로테나커(Rottenacker)에서 태어났다. 1505년부터 1509년까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공부하여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1509년 튀빙겐대에서 공부하였는데, 이곳에서 후일 바젤의 종교개혁자가 된 요한 외콜람파드(J.Oekolampadius)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후 잠은 외콜람파드의 고향 근처 브라켄하임의 목회자로서 1519년 초기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하였다. 1524년 초 브라켄하임을 떠나야 했던 잠은 울름 의회의 결정으로 울음 뮌스터교회의 개신교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 물론 세 번의 설교 심사를 받고 ‘순전하고 명료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은 루터의 종교개혁 추종자에서 1524년 츠빙글리를 지지하는 종교개혁자로 전환하였다.
성만찬 논쟁이 발발할 때, 잠은 츠빙글리와 절친 외콜람파드와 같은 입장에 섰는데, 이로부터 점점 루터와는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루터를 향하여 강한 반대를 하였다. 잠은 아주 거칠게 가톨릭과 루터파에 대적하여 본인의 성찬론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는데, 본인 자신이 루터파와 가톨릭으로부터 강한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잠은 힘들게 그리고 더디게 울름의 종교개혁을 성취하였다. 물론 옛 신앙을 고집하는 소수, 황제와 슈바벤 지방의 동맹을 향한 두렵고 염려스러운 시의회의 정치적 고려가 걸림돌이었다. 시의회는 모든 종교개혁 변화를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의 결정이 이뤄질 때까지 미루려 했다. 특히 새로운 성찬식 집례에서 더욱 그러했다. 다행히도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미사를 폐하고, 성화와 비성경적 관습을 제거하는 결정을 하였다.
수도사들은 침묵할 것과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였는데, 잠은 바이어른 출신 엘리자베드라는 여인과 공개적으로 혼인하였다. 1528년 잠은 울름의 라틴학교 교장 미하엘 브로탁 (Michael Brothag)과 함께 츠빙글리 정신에 입각한 신앙교육서(Catechism)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 교육’(Christliche underweysung der Jungen und Psalter Davids, 1529)과 찬송가와 독일어 시편 찬송을 출판하였다.
주도홍
전 백석대학교 부총장 /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