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울타리 넘어 이방세계로 복음이 전파된 것은 성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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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울타리 넘어 이방세계로 복음이 전파된 것은 성령의 역사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0.12.01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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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38) -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제부터는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주제는 상당한 관심사였고 여러 논자 들에 의해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유대교적 배경에서 배태된 기독교가 언제 유대교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는가 인데, 이를 순차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는 유대교적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구약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유했던 경전이었고, 구약의 가르침은 기독교 세계로 계승되었다. 첫 개종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유대교적 전통의 실행자들이었다. 하루 3번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율법의 규례를 따라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들은 구약을 중시했고 구약의 가르침에서 메시아를 설교했다.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들의 공동체였다. 그러다가 스데반의 순교 이후 기독교는 이방인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 첫 지역이 로마제국의 제3의 도시였던 안디옥이었다. 베드로도 욥바에 있을 때 복음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즉시 그는 로마군의 백부장인고넬료(Cornelius)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행 0:48). 고넬료는 기록상 에티오피아 내시(행 8:38)에 이은 두 번째 이방인 수세자였다.

이제 기독교는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베드로가 이방인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역사하셨음을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했을 때 교회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이를 받아들였다. 또 바울과 바나바가 소아시아 전도 기간 중 이방인 개종자들을 보게 되었고, 이 일로 49년 경 회집된 예루살렘공의회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고 유대인들과의 조화를 위해 최소한 요구, 곧 유대적 음식규례와 도덕적 규범만을 요구하였다.

이제 교회 안에 인종적 장벽은 제거되었다.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혼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는 여전히 유대적 토양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 않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 함께 모였으나 안식일 날에는 회당에서 예배하였고, 바울을 비롯한 초기 전도자들은 그 도시의 회당을 찾아가 전도의 접촉점으로 삼았다. 소아시아 지역의 경우 대략 82개 처에 회당이 있었는데, 회당은 복음전파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소아시아에서 기독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회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안디옥을 비롯하여 바울이 여행했던 지역들은 로마제국의 대도시였지만 동시에 그곳에는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있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로 가기 전에 먼저 유대인들과 접촉했고 유대회당에서 가르쳤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지류나 분파, 혹은 유대교의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로마제국의 인식도 동일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하여, 아가야의 로마 총독 갈리오는 기독교-유대교 논쟁을 단지 유대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린 일이 있고(행 18:12~17), 로마제국은 유대교에게 부여했던 황제숭배 의무를 기독교인들에게도 유예해 주고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복음이 유대교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기독교는 유대교를 완성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대교는 십자가에 달린 갈릴리 출신 목수의 아들을 구약에서 대망해 온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들이야말로 조상의 믿음을 저버린 변절자들로 보았다. 따라서 기독교에 대해 분노했고, 기독교는 궤멸되어야 할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절했고, 하나님도 그들을 거절했다고 여겼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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