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이여, 살아만 있어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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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이여, 살아만 있어주오!
  • 노경실 작가
  • 승인 2020.11.17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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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111

역대상 2:11-15> 나손은 살마를 낳고 살마는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맏아들 엘리압과 둘째로 아비나답과 셋째로 시므아와 넷째로 느다넬과 다섯째로 랏대와 여섯째로 오셈과 일곱째로 다윗을 낳았으며

나는 몇 전부터 경기도에 있는 작은 도서관을 순회하며 강연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이 일은 경기도 교육청에서 주관하는데 1천 곳이 넘는 작은 도서관 중에 선별하여 작가와 예술가를 파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지역 주민들(어린이들을 포함)을 위한 독서문화강좌를 열어준다. 특이한 점은 아파트 단지나 인구밀집 지역에 있는 작은도서관들 중 많은 곳이 교회에서 운영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관장님은 자연히 목사의 아내, 즉 사모님들이다. 

올해에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속에서도 작은도서관 사업은 조심스레 진행되었다. 첫 번째로 내가 방문하여 4회 동안 강연한 곳은 경기도 * *시에 있는 교회가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이었다. 개척교회 상태에서 막 벗어난 교회의 사모님이 관장으로 운영하며, 참석자들은 거의 교인들이었다. 도서관은 교회의 본당을 겸하고 있었다. 또 그 지역 특성상 중국동포들도 몇 명이 있었다. 나는 탈무드와 인문학에 대해서 가장 기초적인 것을 강연했다. 

모두들 열심히 들어주었고, 마지막 강연을 마쳤을 때에는 서로 완전히 정이 들어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크게 아쉬워했다. 10월 중순, 눈부신 가을 햇살과 성도들의 사랑 넘치는 박수를 받으며 나는 일산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앞으로 2시간 이상이 지나야 집에 간다. 그러고보면 경기도는 참으로 큰 땅이다. 

지하철 안은 마치 새벽처럼 승객이 적었다. 이 점 역시 코로나 사태 탓이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어찌나 눈부신지 나는 두 눈을 감았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4회 강연동안 정들었던 주민들, 즉 그 작은 교회의 교인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솔직히 그들 대부분은 문학이나 인문학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평생 소설 책 한 권 읽지 않은 사람들이다. 관심도 없다. 아주 기초적인 역사지식도 없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냥 사람이 그리워서 교회 본당 겸 작은 도서관으로 사용하는 그 곳을 거의 날마다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출중한 것도 아니다. 또, 신앙심이 깊어 기도의 용사들처럼 무릎 꿇으러 오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서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교회에 오면 집사님, 권사님하면서 대접받고, 무언가 늘 먹을거리가 있고, 즉 사람대접 받는 것이 좋아서 오고가며 교회를 찾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내가 작가라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오는 분도 몇몇 있었다. 

그런데도 사모님이 강권하여 인생에 별 도움도 안 될 내 강연을 4회나 들은 것이다. 내가 강연 때마다 극히 기초적인 질문을 해도 답하지 못하는 사람들. 평생 먹고 사는 일, 냉정하게 말하면 ‘육의 일’에만 전념해 온 인생들.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인간적인 외로움과 기복적인 신앙심의 차원을 넘지 못한 채 교회를 찾는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바이러스 사태로 수업 일정이 들쭉날쭉하여 교회로 놀러오는 동네 아이들.   

이 사람들을 생각하는 내내 한숨이 나왔다. ‘세상지식이나 하나님에 대한 앎이 너무도 부족한 부모 아래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커서 무어가 될까?’ 갑자기 그 동네 아이들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아빠찬스 엄마찬스’라고는 ‘아빠와 엄마가 건강하게 존재하고, 일하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아이들이다. 그나마 교회 안에 있는 작은도서관에서 ‘책’을 펼치고 읽는 아이들. 힘 있고, 돈 많고, 많이 배워서 세상 지위 든든한 부모 밑의 아이들과 경쟁한다면 출발하는 순간부터 뒤로 밀릴 것 같은 염려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나의 엄마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노경실, 너의 부모는 어떤 분들이지?’ 그렇구나!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평양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엄마는 초등학교만 다녔다. 그리고 인문학이란 말, 자체도 못 들어보고 인생을 사셨다. 성경을 영어로 읽은 적도 없다. 바하나 렘브란트, 베토벤, 니체, 키에르케고르, 토마스 선교사나 심지어는 사도 바울이 누군지 잘 모른다. 그런데 이런 부모 밑에서 ‘작가’라는 이름표를 얻은 내가 태어났고, ‘박사’라는 나의 남동생도 태어난 것이다. 

부모는 이런 것 같다. 아이들 옆에 존재해주기만 해도 이미 아이들의 인생을 절반 이상은 세워주는 것이 아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430년의 노예생활, 절망의 40년 광야생활, 70년의 포로생활,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400년이 넘는 침묵의 시간…이 시간 속에서 부모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하나님께 칭찬받고 매 맞으며 하루하루를 통과했다. 그것이 구원의 계보를 써내려간 저력 중 하나가 아닌가! 나는 안심이 되었다. 내가 만난 그 작은도서관의 아이들이 교회와 부모의 품안에 있는 이상 인생과 구원의 계보가 멈추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계보들이 증거 아닌가! 부모들이 살아만 있어주시오! 교회에만 붙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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