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편지들 코만더에게, 1527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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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편지들 코만더에게, 1527년(1)
  • 주도홍 교수
  • 승인 2020.11.1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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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의 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114

의의

편지는 요한서신과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하는 물, 피 그리고 성령의 일체적 사역에 대한 츠빙글리의 신학적 이해를 보여준다. 츠빙글리는 1527년 3월 1일 초봄에 이 짧은 편지를 썼는데, 요한일서 5:4~8에 관한 해석으로 츠빙글리의 성령신학을 제시한다. 특히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츠빙글리의 사상을 보여주는데, 나눌 수 없는 셋의 일체적 사역에 대한 이해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츠빙글리의 이해는 후일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에게도(J. Calvin, 1509~1564) 구원과 영생을 믿는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내적 확신과 사역을 위한 근거가 되었다. 

 

코만더?

스위스 아름다운 호반 도시 루체른(Luzern)의 모자를 만드는 집에서 태어난 요한네스 코만더(Johannes Comander, 1482?~1557)는 후일 그라우뷘덴(Graubuenden)의 종교개혁자로 알려졌다. 코만더는 1502년 겨울학기 바젤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츠빙글리, 바디안(Joachim Vadian)와 함께 대학에 다녔고, 1505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 학위(Baccalaurens)를 취득했다. 학구적이었던 그는 1512년 보좌신부가 되었으며, 1521년 루체른의 에숄츠마트에서 가톨릭 성당의 주임신부로 활약하였다. 1523년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쿠어(Chur) 시의 주교회 마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34년 뜨겁게 활약했다. 1526년 그는 미사 대신 성찬식을 집례했으며, 1527년까지 이곳에서 약 1500 설교를 통해 종교개혁을 역설했다. 코만더는 츠빙글리와 뿐 아니라, 다른 스위스 종교개혁자 폰 바트(Joachim von Watt), 불링거(H. Bullinger), 성 갈렌의(St. Gallen) 바디아누스(Vadianus)와도 깊은 유대를 가졌다. 1525년부터 1528년까지 츠빙글리와 주고받은 여러 편지가 있다. 코만더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와 신앙의 근본이 됨을 설교를 통해 강조하였다. 츠빙글리의 성찬 이해를 받아들였고, 재세례파를 대적하여 싸웠으며, 군대 동맹에 함께 했다. 용병제도와 연금제에 있어 온전히 츠빙글리의 정신에 서서 개혁하고자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그는 18조 종교개혁안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1526년 1월 7일 이뤄졌던 일란츠 종교담화를 옹호하였다. 18조 종교개혁안은 1528년 할러((Berchtold Haller)와 콜프(Franz Kolb)의 베를린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1531년 츠빙글리가 세상을 떠난 후, 1537년 스위스 교회 총회장이 되었으며 츠빙글리 후계자 불링거와 함께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편지의 수신인으로 취리히 교회의 전문 집사와 학교장으로 담임목사가 된 발링(Niklaus Baling, 사망 1553)과 독일 바이어른 출신으로 취리히의 시민권을 획득한 출판업자로서 츠빙글리의 추종자로서 1522년 취리히에서 금식 규율을 깨뜨릴 때 적극적으로 츠빙글리 편에 서서 함께 했던 사람 프로샤우어(Christoph Froschauer, 1490~1564)도 편지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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