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편지들 프로쉬에게, 1524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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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편지들 프로쉬에게, 1524년(3)
  • 주도홍 교수
  • 승인 2020.09.2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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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108

편지의 교훈 
츠빙글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적 사건’(die christliche Sache)이란 복음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츠빙글리가 헤처를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 인식하였다는 말이다. 츠빙글리는 어그러지고 사이비 복음이 판을 치는 시대 종교개혁은 오염되지 않은 순전한 복음이 전해지기를 갈망했다. 그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프로쉬가 젊은 헤처의 동역에 힘입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처는 나중에 다른 길을 가고 말았는데, 그는 1523년 여름 취리히에 와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합류하여, 그해 말 성화와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글을 내기도 했으나, 유아세례를 반대하며 점점 과격해지며 후일 재세례파 무리에 합류하여 영성주의자와 묵시론적 신비주의자로 바뀌었다. 

1525년 1월 21일 헤처는 취리히로부터 추방을 당했고, 그해 말 다시 취리히로 돌아와 츠빙글리와 화해를 하는 듯했으나, 헤처 본인은 신앙 세례를 옹호하는 일에는 거리를 두다, 결국 1526년 초 취리히 종교개혁과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1528년 시작된 재세례파 박해를 피해 비숍스첼에 머무는 동안, 1528년 11월 체포되어 오랜 재판 과정을 거쳐 중혼과 이단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1529년 2월 4일 콘스탄츠에서 목 베임을 당해 29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편지가 말하는 바는 몇 가지이다. 첫째, 동역이다. 프로쉬를 향한 츠빙글리의 편지는 종교개혁이라는 목표를 위해 한 사람의 동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준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다. 무시무시한 박해시대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고,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하고,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무서운 시대에 츠빙글리는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붙들었다. 츠빙글리는 그 말씀이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길 것을 믿었다. 박해가 심할수록 그 말씀이 능력으로 드러날 것을 츠빙글리는 흔들리지 않고 확신했다. 1521년 바르트부르크에 피신한 루터 역시 내 주만이 강한 성이 되심을 믿었으며, 3년 후 1524년 츠빙글리는 그의 말씀만이 궁극적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고 확신했다.

셋째, 같은 성령의 인도다. 어떻게 두 사람 루터와 츠빙글리가 독일과 스위스 다른 장소에 있었어도 이토록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종교개혁과 종교개혁자들은 같은 하나님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했다.

넷째, 말씀의 신학이다. 이 편지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 위에 확고히 섰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개혁신학이 철저하게 ‘말씀의 신학’으로 시작되었음을 이 편지는 분명히 제시한다.

다섯째, 인간의 나약함이다. 츠빙글리가 한동안 함께 했던 동역자들의 실상이 드러날 때,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위기의 시대에서 29세를 일기로 처형당했던 헤처의 모습에서 짠한 마음이 일지만, 혼돈의 시대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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