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편지들 프로쉬에게, 1524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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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편지들 프로쉬에게, 1524년(1)
  • 주도홍 교수
  • 승인 2020.09.0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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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의 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106

츠빙글리는 1524년 6월 16일 아우그스부르크에 거주하는 요한네스 프로쉬(Johannes Frosch, 1480-1533)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1) 

두 사람 사이를 보여주는 이 편지는 혼란의 시대 하나님 말씀의 진리와 승리를 향한 세기말적 대화를 뚜렷이 보여준다. 거기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에게 한 사람의 동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역력히 보여주는데, 그에게 동지란 오직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다르게는 중세의 철학적 신학인 스콜라주의를 물리치고, 규범과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오직 말씀(sola scriptura)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새로워지는 사람이다.

프로쉬? 
츠빙글리보다 4살 연상인 프로쉬는 종교개혁에 호의적이었다. 아우그스부르크에 위치한 성 안나 카르멜 수도원 원장이었던 그는, 15, 16세기 스콜라주의 부활을 추구했던 추기경 카에탄(Thomas Cajetan, 1469~1534)의 심문을 루터가 1518년 10월 12일~14일 받을 때, 친절한 환대로 루터 편에 섰다. 프로쉬로 인해 수도원이 종교개혁 운동의 출구가 되었는데, 결국 그는 수도원을 떠나 1530년 뉘른베르크 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부임하였다. 츠빙글리는 프로쉬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화를 기원하며, 편지를 연다. 

츠빙글리는 프로쉬를 “주님 안의 형제”, “나의 형제”로 부르는데, 프로쉬를 향한 츠빙글리의 존경은 그가 “학식이 깊고, 너무도 경건하고, 신실한 말씀의 종”인데 근거한다. 이러한 존경은 그저 입에 붙은 말이 아님을 확인하는데, 프로쉬를 향한 제삼자의 추천을 언급한다. 

육이냐 영이냐
1524년, 독일의 종교개혁이 시작한 지 7년째로 교황청과 종교개혁 진영의 싸움은 치열해져 갔다. 

쉬지 않고 계속되는 혼란스러운 양 진영의 육과 영의 싸움의 현장에 프로쉬는 있었다. 그렇지만 양편 누구도 평화를 위해 이제 서로를 향한 잔인한 공격을 중단하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한 때 츠빙글리는 바울 서신을 가져오며, 교회가 성령의 인도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며, 육이 아니라, 영이 사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육체는 영을 흉내 내지만, 육이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며, 영은 전혀 다르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프로쉬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놓여있을지라도 뒤돌아보지 말고, 오랜 시간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앞만 보고 나아갈 것을 권면한다.


1) ‌Ernst Saxer(edt.), Huldrych Zwingli Ausgewaehlte Schriften, 10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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