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편지들 비텐바흐에게, 1523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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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편지들 비텐바흐에게, 1523년(4)
  • 주도홍 교수
  • 승인 2020.09.0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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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의 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105

루터에게 동의
1523년 츠빙글리는 이 편지에서 루터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츠빙글리는 1523년 나온 「67조 해제」에서 본인이 루터주의가 아님을 6가지 이유로 역설하였는데, 거기서도 성찬 이해에 있어 루터와의 차이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18조에서 츠빙글리는 루터가 말하는 계약으로서의 성례에 대해서 동의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기억으로서의 성례는 다른 관점으로 말한 것임을 밝힌다. 루터는 성찬의 내적 특성과 본질에 대해서, 츠빙글리는 성찬의 외적 사용과 방법, 그리고 성찬식의 진행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표현은 다르지만 둘 사이에는 그 어떤 모순도 없다고 말한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계약’으로서의 성찬 이해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기억’(ein widergedaechniss)의 예식으로서의 정의를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음을 밝힌다. 1523년 당시 츠빙글리가 비판하려고 했던 대상은 루터가 아니라, 중세교회였다는 말이다. 

“‘계약’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성과 특징과 본질을 보여주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에 대한 내 정의를 접겠습니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성찬식을 진행하는 관습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 번 일어난 그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유언인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단지 나는 그것을 ‘희생 제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기억’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츠빙글리, 『저작 선집 2』, 172).

이에 대해 더 언급하면, 성찬 이해에 있어 루터의 이해와 다름이 츠빙글리의 1526년 “우정어린 비판”이라는 글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츠빙글리는 루터를 비성경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의 긴장 관계는 1529년 가을 마부르크 종교담화에 이르러서 본격화되고 극대화되었는데, 루터는 헤어지며 악수를 청하는 츠빙글리를 다른 영을 가진 사람으로 비판하며, 악수를 거절하기까지 했다. 비로소 1531년 츠빙글리는 유작과 같은 본인의 ‘신앙선언’에서 영적 임재를 내세우며, 중세교회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론을 모순적이고, 무신론이라고까지 정죄하기에 이르렀다.

맺는말 
1523년 비텐바흐에게 보낸 이 편지는 요한 6장에 근거한 츠빙글리의 명료한 성찬 이해가 중세교회의 화체설과는 전혀 다름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츠빙글리는 화체설을 우상숭배로 정죄한다. 그때까지 츠빙글리의 전선은 아직 교황청이었다. 비텐바흐에게 어려움과 박해가 따라올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는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 비텐바흐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화체설을 부인하였고, 중세교회와 결국 이별하였다. 편지는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위해 특별한 부름을 받았고, 그를 위해 그 어떠한 고난도 기꺼이 감당할 자임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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