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이후 예배당, 웅장하고 사치스럽게 변하며 힘을 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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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이후 예배당, 웅장하고 사치스럽게 변하며 힘을 과시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0.09.0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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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였을까? ⑧

앞에서 4세기 초 기독교 공인(313) 이후 교회당 건축의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실리카 건축양식이었음을 지적하였다.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교회당은 종 방향으로 3등분하였는데, 아트리움(atrium), 회중석(naves) 그리고 성소(sanctuary)가 그것이다. 아트리움은 벽돌에 의해 둘러싸인 사각형의 형태를 띤 입구이며, 회중석은 바실리카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며, 성소는 회중석 끝에 위치하였고 그 바닥이 한층 높았다. 성소에는 예식을 주관하는 목회자들을 위한 좌석이 있었고 감독을 위한 좌석을 ‘보좌’(cathedra)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로부터 ‘성당’(cathedral)이라는 용어가 파생되었다.

최초로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가 건축된 것은 313년 건축을 시작한 라테란의 성 요한(St. John in Lateran) 교회당이었다. 로마의 캘리안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예배당은 콘스탄티누스가 경쟁자 막센티우스와 싸웠던 밀비안 교(橋)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여 지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형태의 건축이었다. 5랑식(廊式)으로 네이브와 안쪽 아일 사이는 콜로네이드로, 바깥쪽 아일은 아케이드로 각각 처리했는데, 314년 완성되었다. 

315년경에는 두로에 바실리카 형의 예배당이 건축되었는데, 이 바실리카는 가장 대표적인 예배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콘스탄틴은 로마 7개 처에 교회당을 건축하고, 콘스탄티노플에는 ‘성스러운 평화’라는 이름의 세인트 아일린 교회당을 짓도록 지시했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베들레헴에 성탄교회를, 그리고 감람산교회도 건축하였다. 제국의 중요 도시에는 큰 교회당이 건축되었는데, 이러한 건축은 회집의 필요성보다는 자기 이름을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콘스탄티누스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지금은 그 당시 건축한 교회당이 거의 파괴되었지만 그 기본 구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외형적인 웅대함과 찬란함 속에 진정한 경건과 믿음은 점차 사라져 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크리소스톰과 같은 교부는 이런 외적인 치장을 경계하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는 바실리카 형식의 예배당을 건축했으나 유럽 사회의 건축 양식의 변천과 함께 중세에는 로마네스크식, 고딕식, 르네상스식, 바로크식 혹은 네오 고딕식 등 다양한 형태의 건축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첫 3세기 동안의 예배당의 변천과정에 대해 살펴 정리하면 초기 교회는 가정교회로 출발하였고,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 이후 200여년 간 별도의 예배당이 없었으나, 256년 최초의 공식적인 집회장소로서의 예배당 건물이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교회의 설립 이후 대략 150년까지의 그리스도인들의 공식적인 집회소는 가정집이었으나, 150~250년 어간에는 가정집을 개조한 예배당이, 250년 이후에는 기존의 건물이나 홀이 집회소로 사용되었고, 313년 기독교의 공인 이후 바실리카 형태의 교회당이 세워졌음을 지적하였다. 초기 기독교회는 이방 종교와는 달리 상(像)이나 신전(temple)과 같은 종교적 필요를 위한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고, 평범한 가정집에서 모였다. 이것이 기독교 공동체와 다른 종교와의 큰 차이점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공동체를 철학학파로 이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후에는 종교적 목적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에밀 브루너는, 단순한 신자의 모임(에클레시아)이었던 기독교 공동체가 교회당(Kirche)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타락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4세기 이후 교회당, 교회당 구조의 사치스런 변화에 대한 지적이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는 기존의 초가(草家)나 한옥을 예배당으로 사용하였으나, 1910년 이후 예배당은 서양식 구조를 따르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 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교회의 건축양식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서양식 예배당 건축 양식에 대해 최초로 이의를 제기한 인물은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J. S. Gale, 1863~1937)이었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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