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위한 충성에 방점 찍힌 ‘헤세드’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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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위한 충성에 방점 찍힌 ‘헤세드’로 살아가야 한다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0.07.21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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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 교수의 잠언이야기 (22) - “사람이 바라는 것은 한결같은 사랑이다”(잠 19:22 상)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들 합니다. 실제로 별똥별을 만났을 때 해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와~ 하고 감탄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니 언제 소원을 말한단 말입니까. 아마 그 짧은 시간에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무언가를 사무치게 원하는 사람은 그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할 테니 소원을 이루게 된다는 말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잠언 19:22은 사람의 소원이 무엇인가 묻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와 명예, 건강 장수 등등 많겠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은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을 빼면 세상에 시와 소설과 노래가 얼마나 남을지 상상해보십시오. 흥미롭게도 이 절에는 히브리어에서 사랑과 관련된 중요한 두 단어 ‘아하바’와 ‘헤세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아하바는 근본적으로 대상을 원하는 마음을 강조하고, 헤세드는 그 상대를 위한 충성에 방점을 둡니다. 조금 어색하지만 잠언 19:22을 원문의 구조를 살려 옮기면 “사람의 소원은 그의 헤세드이다”가 됩니다. 공역본들은 “사람이 헤세드를 지녀야 남들의 사랑을 받는다” 혹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헤세드이다”는 뜻풀이를 놓고 갈리는데, 제 의견으로는 뒤의 것이 더 낫습니다. 배고프면 밥을, 가난하면 돈을, 살만하면 힘과 명예를 원하는 게 사람이라지만, 모든 사람이 그 마음 속 깊은데서 갈망하는 것은 헤세드입니다. 제 의견이 아니라 성경의 평가가 그렇습니다. 인간은 헤세드로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그분의 본질에 속한 것이어서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한 언약에 묶여 있어 우리의 배신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헤세드에 따라’ 사랑하시고, 대적하는 자들은 ‘헤세드에 따라’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한 가지 문제는 헤세드를 번역하기가 까다롭다는 사실입니다. 헤세드를 인애나 인자로 옮기면 너그러움은 살리지만 끈기와 강인함은 가려지고, 사랑이나 정으로 옮기자니 너무 감성적이어서 실천적 의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정은 한국어만의 문제가 아닌 듯 영어 역본의 경우도 loving kindness나 steadfast love처럼 두 단어를 중첩해 번역하곤 합니다. 앞의 것은 사랑 담긴 친절, 뒤의 것은 꾸준한 사랑 정도에 해당하니, 원어 단어가 갖는 넓은 함의를 옮겨보려 하는 번역자들의 고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이 어렵다 해서 그 뜻을 새기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녹아든 인격입니다. 자신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남에게서는 그것을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 19:22 말씀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레 11:45, 벧전 1:16)는 하나님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나의 헤세드를 닮아 너희도 헤세드의 인격을 지녀라”는 당부로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흠 없을 수는 없지만, 크게 보아 그 성품이 어떠하다는 정도의 일관성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헤세드-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거짓말은 언젠가 드러나고 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기에(19:1, 5, 9), 가난해도 깨끗하게 사는 것이 양심을 속이는 것보다 우월한 삶입니다(19:1, 22). 그리고 놀랍게도 성경은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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