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삼는 일’이 더 중요했던 초기 성도들, 건물은 중요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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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삼는 일’이 더 중요했던 초기 성도들, 건물은 중요치 않아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0.07.21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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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22)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였을까? ②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은 개인의 가정집에서 회집했다. 바울의 개종자들이 가정 중심의 공동체를 형성해 간 것은 회집할 다른 장소가 없었다는 불가피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은밀한 회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가정집에는 주방이 있어 공동식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건축사학자인 리차드 크라우다이머(Richard Krautheimer)는 예루살렘에 교회가 설립된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을 받는 4세기 초까지(30~313)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세 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쳐 왔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시기는 대략 30년부터 150년까지인데, 이 시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신자들의 가정집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시기는 대략 150년부터 250년 어간인데, 이 시기는 가정집을 개조하여 전적으로 집회소로 사용하는 시기였다고 보았다. 세 번째 시기는 대략 250년에서 313년까지인데, 콘스탄틴에 의한 바실리카 형태의 예배당이 세워지기 전으로서 사적이든 공적이든 큰 건물이나 홀이 집회소로 대두된 시기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개인의 가정집에서, 개조된 가정집으로, 보다 넓은 홀이나 건물로, 그리고 바실리카 교회당으로의 변천을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첫 3세기 동안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 변천 과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상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별도의 집회소를 생각하지 않았고,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지도 않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믿는 자들로 구성되는 모임(會)이지 건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별도의 집회소에 무관심했던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들에게 시급한 과제는 제자 삼는 일, 곧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증거하는 것이었지 외적인 건물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 종교처럼 신전(temple)과 같은 건물 취득을 추구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도 이런 의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별도의 예배 처소에 대한 암시나 요구가 없다. 

둘째, 가정집은 사적 공간이었으므로 회집자들의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개인 주택은 신앙의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았던 시대에 회집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이 당시 ‘가문’이라고 할 때 그 가속(家屬)은 직계 가족만이 아니라 노예나 해방된 노예, 일꾼, 때로는 소작인이나 동업자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조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정집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전한 회집, 공동식사와 교제의 유용한 환경이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선교활동에서 이런 가정 중심의 복음운동의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당시 기독교는 불법의 종교였으므로 합법적인 재산 취득이 불가능했다. 이들은 흔히 정치적인 집단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ός)으로 불렸는데, 이것은 라틴어로 그리스도당파(partisan of Christ)라는 정치적인 용어였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라틴어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로마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이 용어가 그리스어였다면 그리스도(christos)의 형용사형은 christesios나 christites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문법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그런데 christianos로 된 것을 보면 로마식(라틴어)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트스(Augustus)를 따르는 이들을 아우구스티아노스(Augustianos, 혹은 Augustianus), 곧 아우구스트스의 정파(a political partisan of Augustus)라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는 정치적인 용어였기에 신자들은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 말은 신약성경에도 오직 3번 사용되었다(행 11:26, 26:28, 벧전 4:16). 어떻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불확실한 법적 지위 때문에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예배당을 확보하는 일은 시급한 요청이 아니었다. 이런 현실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개인주택이었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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