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세대 넘어 부모까지 변화, 순수한 열정과 신앙 지켜갔으면
어렸을 때부터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한 번 더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잠깐 멈춘 주일학교 기차는 언제 다시 운행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한국뿐 아니라 코로나19를 피해가지 못한 전 세계 국가들이 모두 비슷한 사정이다.
필리핀에도 코로나19의 검은 구름이 덮쳤다. 벌써 확진자는 5만 명을 넘어섰고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령이 풀리지 않고 있다. 필리핀에서 유치원을 운영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는 차미정 선교사. 백석대학교 기독교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기 위해 한국에 잠깐 들어온 그도 선교지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발이 묶인 상태다. 몸은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필리핀의 아이들에게 머물러 있는 차 선교사를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만났다.
운명처럼 이어진 필리핀
차미정 선교사에게 필리핀은 운명 같은 곳이다. 진주에서 교회 대학부에 출석하던 1991년 단기선교로 떠났던 곳이 바로 필리핀이었다. 처음으로 접한 선교지였던 터라 애정이 남달랐다. 그 다음해에도 그 땅이 잊혀지지 않아 필리핀으로 떠났고, 선교에 대한 관심은 선교단체 간사로 헌신하는데 까지 이어졌다.
당장 필리핀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필리핀과의 인연은 신기하게도 끊어지지 않았다. 필리핀으로 가기에 앞서, 한국에 들어와있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청주에 있는 한 전자회사에서 1993년부터 필리핀 산업연수생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그 회사에 있던 크리스천 한국인 직원들이 이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필리핀 연수생을 위한 기도모임이었죠. 그런데 한국인 직원들은 언어에 한계가 있으니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몇 분의 목사님이 거쳐 가시다가 1995년부터 한인수 목사님이 맡게 되셨어요. 한 목사님도 처음엔 못하겠다고 거절했지만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들을 돌보라는 마음을 주셔서 시작하셨다고 해요.”
사실 청주 전자회사의 필리핀 직원 선교와 차미정 선교사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인수 목사가 차 선교사 교회의 청년부 수련회에 오면서 톱니바퀴가 맞물리기 시작했다. 한 목사는 처음부터 이 사역에 함께 협력해달라고 제안했지만, 타지로 가는 일에 선뜻 대답이 나오진 않았다. 그래도 답은 정해져있었다. 깊은 고민과 기도 끝에 그는 청주로 향하는 짐을 챙겨들었다.
“정신없이 사역하다보니 어느새 한국에 왔던 필리핀 연수생들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죠. 훈련받은 연수생들은 이곳에서처럼 필리핀에 있는 한국회사에 가서도 예배를 세우자는 비전을 품게 됐습니다. 하나 둘 씩 예배를 세워가다 보면 결국 필리핀 복음화에 한 발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같은 비전을 품고 저도 필리핀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죠.”
복음의 통로가 되고자
단기선교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러 마주한 필리핀. 원대한 꿈을 안고 공항에 발을 내렸지만 필리핀의 현실은 한국의 환경과는 많이 달랐다. 회사에서 사람들을 만나도 관계를 구축할 즈음이면 멤버가 달라졌다. 필리핀에 왔던 목적인 ‘제자화’를 이루는데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침 필리핀에는 주택단지가 붐처럼 조성되고 있었다. 필리핀 전역에 경쟁적으로 신도시가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차미정 선교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마닐라 남쪽의 카비테 지역. 그는 사람들이 왕성하게 몰려들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2003년, 기도의집교회(House of Prayer World Mission Church)는 그렇게 시작했다.
필리핀은 가톨릭 비율이 86%가 넘는다. 필리핀에 이미 상주하고 있는 한국인 선교사의 수도 상당하다. 그래서 국내에선 가톨릭 국가 필리핀에 선교사를 또 보낼 필요가 있느냐며 눈총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차미정 선교사의 생각은 달랐다.
“필리핀의 가톨릭은 중남미 국가의 양상과 비슷해요. 그들의 민속신앙을 가톨릭이 대체했을 뿐 진짜 복음이 스며들어간 모습을 찾기 힘들죠. 세례만 주고 교세를 확장하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니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샤머니즘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진짜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재복음화가 필요해요.”
한국 사람들에게 가톨릭과 개신교는 이웃종교지만 필리핀에서는 다르다. 필리핀의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바뀌는 것은 옆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종으로 받아들여진다. 부모들도 처음엔 자녀들이 교회 주일학교에 가는 것을 말리지 않지만 개종할 낌새가 보이면 즉시 가지 못하게 막는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선 먼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돌파해야만 했다.
“한국 사람 못지않게 필리핀 사람들의 교육열도 엄청나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과외에도 돈을 아끼지 않죠.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과의 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생각했던 것이 유치원이었어요. 사립으로 운영하며 현지에 다른 사립 유치원의 절반도 안 되는 비용을 받았지만 커리큘럼은 어딜 내놔도 부끄럽지 않게 구성했죠.”
‘Spring of Wisdom 유치원’에 들어오기 위해선 신앙교육을 받아도 좋다는 동의서를 작성해야 한다. 개신교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진 필리핀 주민들이지만 유치원에 들어오려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훈련된 교사들, 그리고 인격적인 대우와 가르침, 무엇보다 유치원에 와서 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이 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이곳에서 개설해 아이들을 가르쳐달라는 요청까지 쇄도할 정도다.
“일주일에 한 번 교사 회의가 있어요. 그때마다 전 교사들에게 처음 유치원을 시작할 때의 비전을 상기시키죠. 이곳은 단순한 직장도, 비즈니스 수단도 아닌, 진정한 교육기관인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통로라는 사실을요. 하나님이 허락해주신다면 교육과정을 확대해서 크리스천 교육기관은 이렇다는 좋은 샘플을 이곳에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요.”
순수한 신앙 유지됐으면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의 여파로 필리핀도 유치원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잠시 유치원의 문은 닫혀있지만 교사들이 자비량으로 성경학교를 열고, 교회에 찾아오기 힘든 아이들을 찾아가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차미정 선교사와 교사들의 열정은 부모들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처음엔 단순히 양질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의 문을 두드렸던 부모들은 이제 교회에 나와 주일학교 교사로 섬길 정도로 변화됐다.
필리핀은 한국교회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선교지다. 현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도 많고 필리핀으로 향하는 단기선교팀의 숫자도 상당하다. 그랬기에 한국교회를 향해 하고 싶은 메시지를 물었다. 그런데 차미정 선교사의 대답은 사역을 향해 지원과 관심을 요청하는 평범한 메시지와는 달랐다.
“지금은 다문화시대죠. 꼭 선교사로, 선교지로 나오지 않아도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이 많습니다. 한국교회의 선교가 이제는 인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과시적인 형태가 아니라, 보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의 삶과 밀접했으면 좋겠어요. 물질로 해외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만으로 스스로 선교를 다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한국에 있는 타민족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갔으면 해요.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선교를 후원하는 것을 넘어 직접 선교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 배운 아이들이 자라 필리핀의 복음화를 이끄는 것, 한국에서 지원받는 사역을 넘어 필리핀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것이 차 선교사의 비전이다. 하지만 누구나 꿈꾸는 폭발적 성장과 그의 꿈은 거리가 있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한국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했죠. 하지만 물질적 부요가 영적 생활에 긍정적 역할만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보다 선교사들에게 물질의 지원은 많아졌지만 선교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은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까워요. 오히려 가난한 필리핀 현지인들이 더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나중에라도 하나님이 필리핀에 물질적 축복을 부어주셨을 때, 이 신앙이 변질되지 않고 복음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유지됐으면 합니다. 그것이 필리핀을 향한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