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예배당 없이 성도의 가정에서 ‘가정교회’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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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예배당 없이 성도의 가정에서 ‘가정교회’로 모였다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0.07.0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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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였을까? ①

지금까지 기독교의 기원에서부터 기독교회의 지역적 확산, 그리고 급성장한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제부터는 초기 기독교회의 모임, 집회소, 혹은 집회공간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추적해 보고자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며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었을까? 오늘의 예배당과 같은 집회소로서의 교회당은 언제부터 생겨나게 되었으며 어떤 발전의 과정을 거쳐 갔을까? 몇 회에 걸쳐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답해 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공식적인 집회소로서 예배당 건물이 처음 발견된 것은 256년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였다. 고대도시 두라(Dura)를 헬라인들은 유로포스(Δοῦρα Εὐρωπός, Europos)라고 불렀는데, 이곳은 영국군에 의해 1920년 발굴되었다. 그 후 프랑스와 미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했는데, 이 발굴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굴로 간주되고 있다. 필자가 호주 매쿼리대학교 초기기독교연구소에서 연구할 당시 두라-유로포스 발굴에 관한 화보로 된 발굴보고서를 보았으니 서지사항을 기록해 두지 못한 일을 늘 후회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로 판단되는 교회당이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이 교회당 건물은 256년 이전에 건축되었는데, 칼 볼츠나 베인톤은 230년 혹은 232년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건물의 규모는 5x13m의 크기로 약 60명 정도까지 수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건물에는 욕조가 딸린 작은 세례실이 있어 이곳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 유적은 현재는 미국 예일대학 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1932년에는 이곳에서 미국 미시간대학교 고고학 교수였던 클라크 홉킨스(Clark Hopkins) 박사에 의해 선명한 형태의 유대인 회당이 발굴되었다. 이런 발굴은 두라-유로포스에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존했다는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처음 발견된 이 교회당이 230년경에 예배처소로 개조된 것으로 본다하더라도 이것은 일반화된 것은 아니므로 적어도 예루살렘에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30년경) 이래 약 2백년 간 독립된 집회소로서의 교회당 건물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사실을 보여준다. 수녀이자 천주교 학자인 케롤린 오섹(Carolyn Osiek)이나 데이비드 발취(David L. Balch) 같은 학자는 예루살렘교회의 설립 이후 적어도 첫 150여 년 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예배를 위한 독립된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단지 필요한 경우 기존의 이용가능한 장소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오늘 우리가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이고,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라고 말할 때 고린도 지역이나 로마에 교회당 건물이 있고, 그 건물에 회집하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바울 서신이 기록될 당시 별도의 교회당 건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후서 혹은 로마서는 어떤 책인가? 고린도나 로마지역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일 뿐이다. 사실 로마서 서두에는 ‘교회’라는 용어도 나오지 않는다. 단지,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보낸 편지일 뿐이다. 당시에는 성도의 가정에서 회집하는 가정교회가 있었을 뿐이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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