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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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 손동준 기자
  • 승인 2020.06.22 23: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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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기획 - 오해와 이해 : 나는□ 입니다 ⑯ 전쟁의 증인 ‘6.25 참전용사’

경험하지 않은 세대는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의 참상
참혹한 전투만큼이나 두려웠던 배고픔과 가혹행위
생존자들에게도 평생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상흔’

2020년은 6.25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뜻 깊은 해다. 희생자의 헌신을 기리며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르치고 지키는 일이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2020년은 6.25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뜻 깊은 해다. 희생자의 헌신을 기리며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르치고 지키는 일이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시편 90편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다. 즉 70은 한 세대가 인생을 살고 떠나는 수명으로서의 숫자이기도 하다. 6.25 한국전쟁이 70년을 맞았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은 서서히 세상을 떠나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이 증언하는 전쟁의 참혹함을 통해 대략의 느낌을 유추할 뿐이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의 끝자락에서 한국전쟁 70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6.25남침 한국전쟁 참전 용사 76인의 증언글 ‘용사는 말한다’(펴낸이:오정호 목사)를 바탕으로 참전용사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모아봤다. 

 

상상하는 것 이상의 두려움

1932년생으로 한국전쟁 당시 6년간 복무하고 병장으로 전역한 남성희 씨. 남 씨는 “나에게 6.25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고 했다. 그에게 전쟁은 하루하루가 위기였다. 한 번은 지리산 자락 운봉(남원) 근처를 다니면서 전투를 할 때였다. 땅을 파고 그 안에서 잠을 자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봤는데 갑자기 수류탄이 터졌다. 놀라서 땅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고 겨우 목숨을 구했다. 알고 보니 전우 한 명이 수류탄 안전핀을 빼서 자살을 한 것이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을까 싶으면서, ‘나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구나’하는 감정이 뒤섞였습니다. 그 후로 잠 못 자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잊지 못하는 조재문 씨(92세)는  “하루는 분대원과 함께 전사자를 이송하는데 포탄이 옆으로 떨어졌다. 순간 ‘다 죽었구나’ 싶었다”며 “운이 좋게도 흙을 뒤집어쓴 채 돌 파편만 조금 맞았다. 가벼운 찰과상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함께 있던 분대원은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그는 “나는 살았는데, 전우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안타깝고, 미안하고, 괴로웠다.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며 “수많은 전우들을 보내고서야 휴전을 맞았다. 내게 전쟁은 가슴 아픈 이별과 처절한 배고픔으로 기억된다. 마음이 괴롭고, 몸이 힘들었기에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전했다. 

이처럼 전쟁은 숱한 죽음을 목격해야 하는 참혹한 현실이다. 굳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내 곁의 동료들을 떠나보내는 트라우마는 그들의 평생을 지배했다. 

 

적보다 두려운 적

전쟁 당시 1년간 복무하고 상병으로 전역한 나종진 씨(88세)는 “전쟁은 해야 하는데 보급이 형편없었다”며 “항고(군용 도시락) 하나 주고 셋이 먹으라고 하더라. 게다가 식수도 없어서 눈을 녹여 마시곤 했다”고 회상했다. 

“생각해보면 춥고 무섭고 미치도록 배고픈 기억 밖에는 없어요. 그게 그렇게 슬픕니다. 서로 죽자고 덤벼들고 싸우고 죽이고…. 밥 한 덩이, 건빵 한 봉지를 안 뺏기려고 전우들을 외면하는 게 그게 그렇게 슬픕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정말 끔찍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바로 옆에서 함께 웃던 이웃도 적이 되는 서로 죽고 죽이는 어리석음의 연속이다. 

한국전쟁 당시 6년간 복무하고 상병으로 전역한 이용운 씨도 “나가서 싸워야 하는데 먹는 건 참 형편없었다. 밥을 먹을 때보다 굶을 때가 더 많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나마 먹을 수 있었던 게 달랑 주먹밥 하나였다. 주먹밥을 욱여넣고 치열한 전투를 견디고 버텨내야 했다. 그마저도 안 나올 때는 밭에서 덜 익은 옥수수를 따 먹고 다니면서 전쟁을 했다. 이 씨는 “늘 듣던 총소리가 나지 않아 휴전이 됐다는 걸 온 몸으로 알았다”며 “적막이 흐를 정도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좋다는 감정도 안 들고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고 당시의 감정을 표현했다. 

 

전쟁이 끝나도 계속된 고통

1931년생으로 4년간 복무하다 하사로 전역한 유재철 씨. 어르신은 여름이면 치열했던 전쟁이 떠오른다고 했다. 전쟁이 난 것, 끝난 때도 여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휴전이 된 땅에서 70년을 살았지만 아직 그 기억이 내 삶의 일부처럼 남아있다”며 “결국 전쟁은 누군가는 다치고, 또 누군가는 죽는 것이었으며, 살아남은 누군가는 평생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참혹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전쟁의 상흔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전쟁은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요, 갈라진 조국은 부끄러운 과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학도의용대로 1년간 복무한 강성규 씨는(84세) 빨치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그는 “하루는 산 속에서 빈집에 모여 불침번을 서고 있는데, 빨치산들이 갑자기 문을 열고 총을 겨누었다. 마침 불침번을 나갔던 아군이 반대편 문을 열고 빨치산들을 사살했던 기억이 난다”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진다”고 했다. 어르신은 “계곡 맞은편에서 우리들을 조롱하던 빨치산의 목소리, 두려움에 떨던 전우들 모습, 먼저 떠난 전우들도 떠오르곤 한다”며 “끔찍했던 그 날이 절대 다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미1기병사단 수색대원이던 정인철 씨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없었다. 매일 매일 벌어지는 전투에서 총알받이로 전사하는 전우들의 시체를 방패삼아 목숨을 연명하는 일상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신이 주신 선물과 같은 생명을 인위적으로 파괴하는 전쟁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면서 “유혈사태로 분쟁을 해결하려던 역사의 과오를 바로 알아 배우고 이렇게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게 지난 과오를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의 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 그 참혹한 역사를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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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열 2020-06-25 11:19:45
그러면 앉아서 그냥 죽나요 ㅋㅋ 천진난만한 구상유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