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정한 이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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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정한 이웃인가?
  • 김진홍 목사 금천교회 담임 / 금천설교아카데미 원장
  • 승인 2020.05.27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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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홍 목사의 목회와 설교 | 이야기 설교(Narrative Preaching)

금천설교아카데미 김진홍 목사의 ‘목회와 설교’를 연재하면서 설교 준비 노하우와 다양한 설교 유형을 소개했다. 이론과 더불어 설교 유형에 따른 ‘예문 설교’를 연재함으로 설교 준비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여섯 번째 설교 예문은 ‘이야기 설교’이다. 상-하 두번에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주>

본문 : 눅 10:25~37 
주제 : ‌영생을 소유한 신앙의 삶은 이런 것이다
명제 : ‌신앙과 삶은 함께 사는 것이다
목적 :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이웃의 아픔에 동참한다
구성 : ‌Narrative Preaching

 

1. 평형을 뒤집어라
   (Upsetting the equilibrium)
제가 목회를 하면서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을 천국으로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입관 예배나 발인 예배를 드리면서 ‘이분이 정말 영생을 마음에 소유하고 천국에 가신 것인가?’ 정말 깊은 생각을 해봅니다.

영생을 소유하는 것은 너무나 쉬워서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생이라는 선물이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좋은 영생을 거저 공짜로 주신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나의 마음에 구주로 받아들이면 영생의 피를 수혈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나 장로라는 직분을 받았다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행함이 천국에 가는 기준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제일 먼저 천국에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게 가장 많이 책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외식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화 있을진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은 말과 삶이 너무 다르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위선자’(hypocrite)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외식하는 일들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 생활에서 성령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앞세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신앙에는 본문에 나오는 율법사처럼 영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2. 갈등을 심화시켜라
   (Analyzing the discrepancy)
본문에 나오는 율법사는 영생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술 더 떠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어 봅니다. 이 질문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질문입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욕망에 스스로 묶여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교만과 욕심에 붙잡힌 신앙입니다. 교만은 사탄의 먹잇감이 될 뿐입니다.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율법사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아차 하는 순간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더 의롭고 깨끗하다는 교만에 빠져서 형제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가 더 잘 믿는다는 교만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교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만은 멸망하는 선봉장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내 안에 영생이 있는 신앙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먼저 이어야 합니다. 나는 없고 오직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기만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이미 십자가와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3. 해결의 실마리를 들어내라
  (Disclosing the clue to resolution)
그러면서 율법사는 한술 더 뜹니다.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런 질문에는 자신은 아주 의로운 사람이라는 자만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형식적으로 사랑한 것이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비유를 통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율법사는 주변에 있는 가까운 친구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 한해서만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과는 상관이 없지만 정말 도와야 할 사람을 돕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만 사랑을 합니다.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런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하십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너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4. 복음을 경험하게 하라
   (Experiencing the gospel)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너의 이웃이 정말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웃은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강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웃을 말할 때에 가까운 사람을 말합니다. 언제나 함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나와 가까운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나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영생이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강도만난 어려운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첫째, 육적으로 강도 만난 이웃입니다. 육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희귀병에 걸려서 신음하는 분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의학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고통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사랑하는 것이 네가 영생을 소유하여 성경대로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음이 힘든 분들입니다. 마음이 힘든 것은 육신적으로 힘든 것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마음의 고통은 피가 마르게 합니다. 정신이 쭈그러들게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영적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입니다. 사실 인간은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사탄의 자녀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입니다. 우리 주변에 사탄의 자녀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의 영적인 고통에 대하여 얼마나 아파하고 있으십니까? 함께 눈물로 기도하면서 위로하고 있으신가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영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정말 불쌍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복음적인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5. 결과를 기대하게 하라
  (Anticipating the consequences)
예수님은 본문 36절과 37절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십니다. 그때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너도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이웃은 어떤 사람입니까? 강도당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만 사랑했습니다. 실제로는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종교인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말 나의 구주로 믿고 순종하는 영생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와 마음으로 들어서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잘 익은 수박을 눈으로 보기만 한 사람은 예수님을 지식으로 아는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그 수박을 잘라서 입에 넣어 맛을 본 사람은 예수님을 경험하여 정말로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시편 34편 8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영생을 정말 소유한 사람이라면 강도 만난 이웃을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라고 하십니다. 

본문에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습니다. 

첫째,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마음에서부터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 갔습니다.    
둘째, 가까이 갔습니다. 사람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 구경을 합니다. 증인도 서지 않습니다. 경찰서에 불려 다니는 것이 귀찮다는 것입니다.  
셋째,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응급조치를 취했습니다. 먼저 생명을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섯째,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 주리라 하였습니다. 마음과 행동으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물질까지 돌보아 주었습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말과 삶이 함께 가는 사람입니다. 말과 삶이 다른 사람을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위선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말과 삶으로 함께하는 진정한 이웃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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