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은 못한다는 생각? 음악으로 편견 허물어요”
상태바
“발달장애인은 못한다는 생각? 음악으로 편견 허물어요”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0.05.27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밀알 브릿지온 앙상블’

강남구 일원동은 흔히 떠올리는 강남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도로 양옆으로 울창하게 뻗은 가로수는 코로나 사태로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사이 봄이 훌쩍 찾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풀내음을 맡으며 여유롭게 걷다보니 도착한 일원동교회. 한적한 시골의 여유가 느껴지는 마당을 지나 교회 안에 들어서자 감미로운 음악이 새어나온다. 언뜻 교회 카페에서 틀어놓은 배경음악인가 싶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음악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레 소예배실의 문을 열자 지휘자 한 명과 여섯 명의 단원들이 저마다의 악기 실력을 뽐내며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클래식부터 대중가요, 찬양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조화롭게 공연을 이어간다. 발달장애인 연주자 6명으로 구성된 밀알 브릿지온 앙상블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화음이다.

그동안 발달장애인에게 음악은 그저 교육 수단의 하나라고 인식돼 왔다. 이들이 정식으로 무대에 올라 데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브릿지온 앙상블의 발달장애인들은 당당히 직업으로서의 음악가를 꿈꾼다. 장애에 대한 편견의 벽을 스스로 허물고 있는 이들을 지난 20일 일원동교회에서 만났다.

 

발달장애인 연주자로 구성된 밀알 브릿지온 앙상블. 둘째줄 오른쪽부터 유원석 선생, 윤예찬, 박세현, 김어령, 박지석, 김길원, 최의택 단원.
발달장애인 연주자로 구성된 밀알 브릿지온 앙상블. 둘째줄 오른쪽부터 유원석 선생, 윤예찬, 박세현, 김어령, 박지석, 김길원, 최의택 단원.

 

기적처럼 찾아온 기회

밀알 브릿지온 앙상블이 처음 세상에 선보인 것은 지난해 9. 서울시에서 공모한 장애 인식 개선사업에 밀알복지재단이 참여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진 음악과 미술, 문화예술 분야에 재능을 보이는 발달장애인들이 있었지만 직업으로 연결되진 못했다. 그런데 발달장애인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장애 인식 개선 강사로 나서기 시작하자 이들에게 일자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브릿지온 앙상블의 매니저로 섬기고 있는 조태승 목사의 마음도 벅차올랐다.

그동안 발달장애인을 위한 일자리는 소켓을 만들거나 우표를 붙이는 일 같은 단순 반복 업무에 그쳤어요. 사실 제대로 된 일자리라고 부르긴 힘든 업무였죠. 시간이 지나며 바리스타나 도서관 사서 등으로 확장되긴 했지만 발달장애인이 문화예술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지금까진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시의 사업 지원이 지난해 12월로 종료되고 말았던 것. 3개월이라는 시간은 이들이 안정감을 갖고 정착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밀알복지재단과 조태승 목사의 고민은 깊어갔다.

발달장애인 단원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서려면 단기간의 이벤트성 사업으론 부족했습니다. 서울시 사업이 종료됐을 땐 단원들이 뿔뿔이 흩어질 위기였어요. 고민 끝에 밀알복지재단에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최중증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의 지속적인 일자리를 위해 단원들을 재단 직원으로 안고 가기로 한 거죠.”

재단이 결단을 내리자 상황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조 목사의 표현을 빌리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였다. 장애인 일자리를 지원하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문화예술 체험형 직장 내 장애 인식 개선 지원사업이 등장한 것이다. 내친김에 미술에 재능이 있는 발달장애인을 모아 브릿지온 아르떼도 결성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업계획서를 제출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제 브릿지온 앙상블과 아르떼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으로부터 연간 24천만 원의 지원을 받게 됐다.

 

음악은 생활이고 기쁨

이제 브릿지온 단원들은 직장 내 장애 인식 개선 강사 자격으로 활동하게 된다.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역할을 장애인 스스로가 맡게 되는 것. 기업을 방문해 우선 30분 정도의 이론교육을 진행하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브릿지온 앙상블의 시간이다. ‘걱정말아요 그대’, ‘사랑을 했다와 같이 대중들의 귀에 익숙한 음악부터 클래식, 찬송, 크리스마스 캐롤까지 브릿지온 앙상블이 보여줄 수 있는 무대는 무궁무진하다.

계획대로라면 지난 3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코로나 사태로 발이 묶였다. 단원들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언젠가 만날 관객들을 기다리며 매일 4시간씩 연습실에 나와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두 눈에 빛나는 열정은 여느 전문 교향악단 못지않았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윤예찬 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온누리 사랑 챔버에서 활동하다 브릿지온 앙상블에 오기까지 벌써 연주경력만도 10년이 넘는다. 예찬 씨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땐 항상 기분이 좋고 즐겁다면서 어서 관객들 앞에 서서 공연을 보여주고 싶다는 설레는 마음을 전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곡을 치고 싶어 피아노를 시작했다는 박지석 씨는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다. 지석 씨는 음악은 아름답고 재밌고 감동적이라면서 박자가 안 맞고 연주고 맘대로 안 될 때 힘들지만 열심히 연습해서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첼로를 맡은 김어령 씨는 83년생으로 브릿지온 앙상블의 맏형노릇을 하고 있다. 첼로 현을 쭉쭉 뺄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는 어령 씨는 음악은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생활이고 기쁨이며 즐거움이라고 전했다.

 

코로나 사태로 잠시 공연은 중단됐지만 다시 멋진 음악을 선보일 날을 기다리며 브릿지온 앙상블 단원들은 연습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잠시 공연은 중단됐지만 다시 멋진 음악을 선보일 날을 기다리며 브릿지온 앙상블 단원들은 연습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장애인-비장애인 잇는 다리 되길

앙상블의 이름 브릿지 온(Bridge on)에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뛰어 넘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집합 교육이 일체 중단된 상황이라 공연이 힘들어졌지만, 지난해엔 어린이집과 학교, 복지관, 공공기관을 찾아 음악회를 펼치며 이름 그대로 두 사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장애는 음악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멋지게 무대를 꾸미는 모습에 관객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유원석 선생은 지난해부터 밀알 브릿지온 앙상블과 함께 하며 단원들을 지도하고 있다. 장애를 가졌던 스승이 브릿지온 앙상블을 소개해 준 뒤로 꾸준히 발달장애인과 호흡을 맞추며 그들만의 악보를 그려나가고 있다.

풍부한 감정 표현에는 서툴 수 있어요. 하지만 꾸밈없고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누구든 브릿지온 앙상블의 무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죠.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통해 저는 물론이고 연주를 듣는 이들이 회복되는 느낌을 받아요. 자신감을 잃었던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밀알 브릿지온 앙상블의 무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첫 장을 아름다운 선율로 채우기 위해 단원들은 오늘도 지켜보는 이 없는 연습실에 선다. 조태승 목사는 두렵기만 한 바이러스의 기운이 꺾이고 브릿지온 앙상블 단원들이 다시 날개를 펼 그날이 하루빨리 오길 손꼽아 기다린다.

예술을 전공한 발달장애인들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장벽에 부딪혀 맘껏 꿈을 펼칠 수 없었어요. 이제 재능을 가진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가 주어져야 합니다. 브릿지온 앙상블은 장애인에게도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멋진 역할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우리 단원들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편견을 허무는 다리가 되고 희망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