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와 집회금지 등 악조건 속에 ‘가정 교회’ 형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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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와 집회금지 등 악조건 속에 ‘가정 교회’ 형태 유지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0.05.1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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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⑭ - 기독교 전파의 불리한 상황들

지금까지 로마제국의 변방인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메시아운동이 어떻게 그처럼 신속하게 로마제국의 도시로 확산되어 갔는가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제 이런 확산에 영향을 준 요인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 전파에 있어서 불리한 환경이나 요인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유리한 혹은 긍정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는데, 먼저 불리한 환경에 대해 검토해 보자. 

첫째, 기독교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탄압받는 종교였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유대교의 박해를 받았고, 64년 이후에는 로마제국에 의해 불법의 종교(religio illicita)로 간주되어 3백여 년간 탄압을 받았다. 로마제국은 모든 종교를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합법적인 종교(religio licita)와 불법의 종교가 그것이다. 합법적인 종교란 황제숭배를 받아들이는 종교였고,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종교는 불법의 종교로 간주되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당시 대부분의 종교는 이미 다신교(多神敎)였으므로 기존의 신앙에 황제를 숭배하고 더하여 제물을 바치는 일이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신교였으므로 황제 예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불법의 종교로 간주되어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둘째, 기독교는 불법의 종교였기 때문에 집회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회당을 이용할 수 있었으나 유대교와의 결별 이후 신자들의 모임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공개적 집회는 불가능했다. 이런 시기 기독 교회는 가정 교회 형태로 유지되었다. 신자들의 가정집에서 예배드렸고 참석인원은 15명에서 20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의 피터 람페(Peter Lampe) 교수는 추정하고 있다. 후에는 좀 더 큰 공간으로 변모, 진화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 ‘가정 교회’(domus ecclesisae) 형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기독 교회는 가정이 아닌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예배당 건물을 소유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불법의 종교였으므로 재산 취득이 불가능했다. 교회공동체의 독립된 집회소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256년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 시리아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였다. 고대도시 ‘두라’를 그리스인들은 ‘유로포스’라고 불렀기에 이곳을 ‘두라-유로포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건물은 본래 주택으로 230년 경 지어진 것인데, 교회 처소로 전용된 것이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에서 기독 교회가 탄생한 이래 230여 년간 독립된 집회소로서의 예배당을 소유하지 못했다. 초기 3세기 동안의 교회공동체는 비밀집회로 유지되었다. 

이런 점에서 알란 클라이더(Alan Kreider)는 초기 교회를 ‘잠근 동산’ (Enclosed garden)이라고 불렀다. 사실 이 ‘잠근 동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카르타고의 치푸리아누스였다. 치푸리아누스가 사용한 이 표현은 사실은 자신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구약 아가서 4장 12절을 인용한 것이다. “나의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hortus conclusus)이요”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닫힌 정원이라는 의미였다. 이 말은 교회는 오직 신자들만의 모입이었다는 점이다. 

비두니아 지방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에게 보낸 글에서 트라야누스는 화재를 대비한 소방대 조직조차 15명 이상 모이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지시한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 신자들의 회집은 허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가정 중심으로 예배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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