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알리고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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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알리고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0.05.18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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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 광주, 역사 앞에 당당했던 신앙인들

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맞아
항쟁 참여하고 참상 알렸던 신앙인들의 삶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주년을 맞았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폭도로 규정됐던 광주의 평범한 시민들은 국가권력에 저항하다 죽어갔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되었다. 청년들을 위해 아주머니들은 거리에서 밥을 지어 주먹밥을 나누었고, 공수부대의 총격이 시작된 후 광주기독병원에는 헌혈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당시 오월의 광주에는 5.18 참상을 외면하지 않았던 신앙인들이 있었다. 

목숨을 내어놓은 두 신학생의 결단
예장 통합총회는 해마다 5.18에 즈음해 고 문용동 전도사 순교기념 예배를 드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호남신대 3학년 휴학 중 상무대교회에서 사역하던 문용동 전도사는 광주시내를 걷다가 계엄군에게 얻어맞은 시민을 병원에 호송한 사건을 계기로 항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전남도청 앞 분수대 위에 놓은 수십구의 시체를 담은 관을 목격한 이후 당시 일기에서,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위대에 합류한 문 전도사는 전남도청 지하에 쌓여있는 엄청난 양의 무기와 폭발물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 복무 시절 경험도 있었다. 일부 시위대 강경파는 폭발물을 터트리겠다는 위협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광주 시가지 절반을 파괴할 수 있는 규모의 폭발물을 제거하기로 결단했다. 시민들의 생명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계엄군 부사령관을 만나 뇌관 해체를 위한 전문가를 요청했고, 5월 25일 당시 무기고 내 폭발물과 수류탄 등 뇌관을 분리했다.  

이 때문에 문 전도사는 한 때 계엄군의 프락치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순수하게 생명을 지키고자 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은 현장에 함께했던 민주화운동 인사들에 의해 증명됐다. 문 전도사는 5월 27일 계엄군의 최종 진압 당시 도청에 머무르다 3발의 총탄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당시 한신대학교에 재학 중 휴교 때문에 광주 집에 내려와 있던 류동운 전도사도 항쟁 초기부터 전남대 학생들과 시위를 함께했다. 연행됐다 풀려난 그는 “역사가 병들었을 때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던 설교를 하지 않으셨냐”며 부친의 만류에 항변하고는 금남로로 나갔다. 부활의 소망을 기억했던 그는 신념을 지키다 역시 5월 27일 계엄군에 사격에 의해 사망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허철선 목사의 유해가 2018년 5월 17일 호남신대 양림동산선교사묘원에 안장될 당시 모습. 사진=호남신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허철선 목사의 유해가 2018년 5월 17일 호남신대 양림동산선교사묘원에 안장될 당시 모습. 사진=호남신대

진실을 외면하지 않은 두 명의 선교사
신군부는 5월 광주를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당시 언론들은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했고, 사실보도가 이뤄지지 않은 현실에서 국민들은 그 말을 믿었다. 물론 해외에도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런데 광주에 머물던 두 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은 시민들의 고통과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 때문에 5월의 진실이 세상 밖으로 알려질 수 있었다. 

미국과 독일 등 해외 언론에 알린 인물은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재직 중이던 고 찰스 베츠 헌트리 목사(한국명:허철선)였다. 헌틀리 목사는 광주 참상을 영상물로 직접 기록했고, 그 영상물이 영화 ‘택시운전사’로 잘 알려진 독일 출신 기자 위르겐 헌츠펜터에게 전달돼 전 세계에 보도될 수 있었다.

미국 정부의 피신 제안을 거절하고 진압군의 헬기 사격장면을 촬영했던 고 아놀드 피터슨 목사(한국명 배태선)도 있다. 여전히 신군부 세력은 헬기 사격을 부인하고 있지만, 그가 남긴 증언록의 사진자료는 현장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산 자의 값을 치르며 고뇌한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저자 강성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수습’이 주로 진보적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구호는 보수 교단에 소속된 교역자들에 의해 진행됐다. 당시 광주시기독비상구호위원회가 결성돼 연합활동이 전개됐다”며 “5월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폭도로 규정하려는 신군부에 저항하며 오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5.18 현장을 직접 목격한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합동 부총회장)는 SNS에 “문용동 전도사는 왜 의로운 죽음을 당하게 하셨을까. 나는 과연 산 자의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 그 때는 역사의식이 없었지만, 지금은 문용동의 역사혼을 가지고 산 자의 값을 치르려고 울며 고뇌하고 있다”고 전했다. 소 목사의 글에는 5월 신앙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담겨 있다. 

1981년 5월 신학생 신분으로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설교를 했던 광주 서정교회 장헌권 목사는 “5.18의 역사가 더 이상 왜곡되지 않도록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해야 할 것”이라며 “우리 신앙인들이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고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한편, 전라남도는 올해 전남 강진읍교회를 포함해 25개소를 5.18 사적지로 선정했다. 강진읍교회 윤기석 목사와 교인들은 당시 지역을 순회하면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던 시위대를 지원하는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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