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감소로 신학교 위기… ‘건강한 브랜드’로 모여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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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감소로 신학교 위기… ‘건강한 브랜드’로 모여 들어
  • 이현주 기자
  • 승인 2020.04.28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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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 통합의 역사를 통해 본 백석의 미래 - (5) ‘백석’의 브랜드 가치, 교단 통합 마중물 되다

신학교육의 쇠락은 교단의 미래 불투명하게 해
작은 교단 생존 어려운 시대, “통합만이 살 길”

2009년 제94회 총회를 끝으로 합동정통은 백석으로 바뀌었고, 회기도 1978년을 기준으로 세웠다.
2009년 제94회 총회를 끝으로 합동정통은 백석으로 바뀌었고, 회기도 1978년을 기준으로 세웠다.

합동정통에서 ‘백석’으로 명칭이 바뀌기까지 내적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합동의 아류와 같은 이름은 목회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됐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단 취급도 받았다. 교단의 출발부터 성장까지 예장 합동과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합동정통’이라는 이름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는 상당했다. 

백석총회는 1978년 ‘대한복음총회’로 시작됐다. 장로교의 여러 갈래 중 하나로 분열된 교단이 아니다. 1976년 설립된 대한복음신학교를 모태로 자생적으로 생겨난 총회다. 그런 점에서 총회의 회기 역시 한국장로교총회의 전통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2009년 9월 총회에서 교단 명칭은 학교와 결을 같이해 ‘백석’으로, 총회 역사와 회기는 1978년 교단 창립 당시를 기준하여 ‘제1회’로 수정했다. 

이때부터 총회는 폭발적 성장을 시작했다. 중부권 명문 종합대학교로 성장한 백석대학교는 백석총회의 신뢰도에 밑거름이 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브랜드’를 따지는 세상이 됐고, ‘브랜드’는 신뢰도를 결정짓는 바로비터가 되기도 했다. “백석대학교는 백석총회와 함께 합니다”라는 CF 속 멘트는 두 기관이 얼마나 유기적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2009년 이후 교회들은 새 신자 교육에 앞서 “우리 교회는 백석총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백석총회는 백석대학교와 역사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한다. 국내 유수의 대학과 함께 하는 믿을만한 교단이라는 설명은 이처럼 한 줄로 요약됐다. ‘백석’이 가진 브랜드 가치가 전도와 선교, 목회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총회의 ‘브랜드’ 따지는 시대 도래
한국교회 안에 주류 교단을 구분 짓는 기준은 ‘신학교’다.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정규신학교를 가지고 있느냐로 교단의 건전성을 판단한다. 

과거 한국교회가 부흥에 부흥을 거듭하던 시절은 무인가 신학교로도 목회하기 충분했다. 한국전쟁 이후 70~8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도시교회들은 일단 개척만 하면 성도들이 모여드는 부흥의 황금기를 경험했다. 그런데 국민소득 2만 불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은 ‘성장에서 성숙’으로, ‘노동에서 여가’로 바뀌게 됐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바뀌자 대형화된 교회는 이러한 편의주의 흐름을 타고 성도들이 모이기 쉽도록 가능한 ‘편안한’ 여건을 마련해주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이 어디 출신인가’라는 학력기준과 ‘우리 교회가 어느 교단에 속해 있는가’라는 브랜드 가치를 따지기 시작했다. 브랜드는 정체성과 신뢰의 척도이고, 가치와 상징, 그리고 마케팅에 영향력을 미친다. 내세울 브랜드가 없는 교단은 더 이상 성장하기 힘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마디로 군소교단, 군소신학은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 마련되고 있었다. 

2005년 합동과 개혁의 통합이 이를 잘 증명했다. 구 개혁 측에도 건강한 교회들이 많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부흥성장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합동과 통합한 후 개혁 측 교회들의 성장이 눈에 띄었다. 예장 합동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도약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신학교 위기
학령인구가 감소하면서 지방신학교와 군소신학교들의 위기도 심화됐다. 한국교회의 부흥기인 1982년 당시 우리나라 인구 중 청소년(9~24세 기준) 통계는 1천420만9천명이었다. 하지만 36년 후인 2018년에는 899만 명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학령인구 감소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가시화됐다. 저출산과 비혼의 증가로 인구 감소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고, 대학들은 생존을 모색하는 상황에 처했다. 전 인구의 고학력화는 곧 성도들의 학력 수준도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최소한 내가 다니는 교회가 무인가 신학교를 기반으로 하는 곳은 아닌지 하나하나 따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군소신학 또는 무인가 신학교의 학생 모집과 학교의 현상유지도 어렵게 됐다. 신학교가 무너진다는 것은 교단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교단은 버티기 힘들다. 단순히 목회자의 설교 하나로 부흥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단이나 신학교가 그 교회의 가치를 판단할 ‘브랜드’가 되지 않고서는 목회가 힘든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백석총회의 교단 통합은 이러한 미래적 관점에서 추진됐다. 통합을 주도한 장종현 총회장은 한국교회의 거듭된 분열로는 건강한 미래를 열어가기 어렵다는 판단과 함께, 앞으로는 큰 물방울이 작은 물방울을 흡수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며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건강한 브랜드 이미지를 가진 교단만이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전망했고, 신학교육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교단이 생존할 것으로 판단했다. 
 

‘백석’ 브랜드로 2013년부터 통합
백석총회는 2011년 통합전권위원회를 구성하며 대신총회와 또 통합 논의에 나섰지만 결과는 또 불발이었다. 1999년, 2002년, 2005년, 2011년 4차례 통합 추진은 결국 ‘안 되는’ 것으로 끝났다. 교단 명칭을 논의할 때는 항상 대신을 앞에 세웠고, 신학교 명칭, 임원 순서 등에서 백석이 양보했지만 “백석과의 통합은 사실상 대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과 같다”는 반대의 벽을 한 번도 넘어서지 못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백석총회는 교단 명칭을 변경한 후 ‘백석’ 브랜드를 강화하며 성장을 거듭해갔다. 대신과 교단 통합도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신이 아닌 다른 장로교단들이 통합을 제안해왔다. 2000년대 들어 첫 번째로 성사된 통합 파트너는 ‘개혁 장지동측’이었다. 

2013년 7월, 제35회 2차 임시총회 안건은 ‘교단 통합 및 교단 발전의 건’이었다. 통합전권위원회가 추진해온 통합 안건을 다루면서 9월 총회는 양 교단이 함께 하는 ‘통합 총회’로 열기로 한 것이다. 

당시 통합전권위원이었던 양병희 목사는 “한국 교회를 향한 사회적 지탄과 안티기독교의 공격이 무섭게 몰아치는 가운데 한국 교회가 연합하고 한 목소리를 내야 할 시점에 놓였다”며 “분열된 교회를 연합하고 흩어진 성도를 모으는 일에 백석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인간적인 기준에서 통합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서야 한다면 분열의 역사를 끝내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 신앙운동에 한 교회라도 더 동참시키는 것이 순종”이라고 말했다.

전권위원회의 통합 보고는 만장일치 기립박수로 통과됐다. 2013년 예장 개혁과 통합을 시작으로 백석총회는 2015년까지 크고 작은 교단들과 하나됨을 이루며 ‘연합의 마중물’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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