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정통과 통합하자” 잇단 러브콜…교단 명칭 ‘백석’으로 바꾸며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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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정통과 통합하자” 잇단 러브콜…교단 명칭 ‘백석’으로 바꾸며 변화
  • 이현주 기자
  • 승인 2020.04.1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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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 통합의 역사를 통해 본 백석의 미래 - (4) 될 듯 말 듯 ‘통합 추진’ 누구와 어떻게 해왔을까?

2000년 대신과 통합 무산 후 2002-2005-2011년 계속 통합 추진
예장 통합총회 ‘장로교단 통합’ 대명제 아래 합동정통과 대화 시작
대형교단 경쟁적으로 “합치자” 제안 … 2009년 ‘백석’으로 새 출발

교단이 통합이라는 과정을 거쳐 하나가 되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다. 그런데 아무 조건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총회라는 조직 자체가 이미 권력화 됐고, 소유한 것도 너무 많다. 세속화된 교단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통합 자체를 포기하거나 독자 생존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기독교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1990년대부터 언급된 성도수 감소와 교회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서구 유럽의 예배당이 비어간다는 소식은 머지않은 미래 한국교회의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크다. 학령인구 감소와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 하락의 여파로 신대원은 이제 정원을 채우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통합·합동 분열 50년, 장로교총회 설립 100주년, 성결교단 창립 100주년 등 역사적 분기점을 앞둔 교단들은 ‘통합’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건강한 신학교를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한 합동정통(현 백석총회)은 2000년대 들어 한국교회에 불어온 교단 통합 열풍을 타고 여러 교단에서 통합 파트너로 러브콜을 받았다. 예장 대신과의 통합도 3~4년에 한 번씩 잊을만하면 다시 추진되곤 했다.  

지난 2009년 예장 통합총회의 제안으로 교단통합을 전제로 한 교류가 시작됐다.
지난 2009년 예장 통합총회의 제안으로 교단통합을 전제로 한 교류가 시작됐다.

2000년대 들어 ‘교단 통합’ 바람 불어
신학교까지 ‘대신신학대학원대학교’로 한다는 힘든 결정에도 불구하고 대신과 합동정통의 통합 추진은 2000년 9월 총회에서 무산됐다. 이후 유덕식 목사가 총회장에 취임하면서 2005년에 통합은 다시 추진된다. 그러나 그 사이 2002년에 잠깐 또 한 번 통합 논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합동정통 총회와 대신총회, 개혁국제총회 등 3개 교단이 통합하는 것을 논의했다. 이 3개 교단은 중형급으로 각 교단마다 입장은 다르지만 만약 통합된다면 규모나 파급력 등에서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됐다. 

총무단 모임에서 처음 나온 교단 통합은 9월 총회에 각각 상정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3개 교단은 6월에 대화를 시작한 후, 7월경에는 합동정통과 대신이 먼저 통합하고 나서 개혁국제와 통합하는 형태로 의견이 오갔다. 당시에도 합동정통 임원들은 교단 통합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예장 대신은 ‘대회제’ 형식을 주문했다. 3개 교단 통합은 9월 총회까지 이르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다시 구체적으로 통합이 논의된 것은 2005년이다. 2000년대 들어 한국교회 안에는 통합 논의가 활발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한 지붕 두 가족체제’를 논의하고 있었고, 기성과 예성도 성결교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2003년부터 합동을 추진했다. 2005년 합동과 개혁 광주측이 통합에 성공했고, 9개로 갈라진 개혁 안에서도 합종연횡이 일어났다. 이러한 통합의 물결을 타고 합동정통과 대신의 통합 추진은 다시 시작됐다. 2000년 9월 총회에서 결렬된 후 5년 만이다. 그 사이 대신총회는 개혁광주와 통합을 논의했고(2002년), 웨신총회와도 비공식적으로 접촉(2004년)했다. 

2005년 3월 28일 새중앙교회에서 열린 예장 대신 실행위원회에서는 합동정통과의 교단 통합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4월 봄 정기노회에서 통합 안건을 수의에 부치는 안도 나왔다. 당시 통합추진위원장을 맡은 유덕식 목사는 “교단 성장이 절실한 시기를 맞아 합동정통과 합동은 시대적인 요청”이라며 “대신 교단은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가운데 확실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합동정통 총회는 천안대학교를 중심으로 성공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있어 큰 유익을 줄 것”이라고 실행위원들을 설득했다. 

이어 “양 교단은 교리 정치 생활 등 정서적으로 신뢰감을 갖고 있으며 합동정통 총회와 인준 관계인 많은 교육기관은 대한신학의 정체성을 이어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고 밝히면서, “모든 일에는 갈등이 있으니 만큼 교단 안에 상처가 생기더라도 통합은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강한 통합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9월 총회에서 통합은 또 무산됐다. 합동정통보다 앞서 총회를 개최한 대신에서 ‘영입반대’ 여론이 강했고, 통합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렸다. 통합을 반대하는 그룹에서는 “사실상 합동정통 측에 영입되는 분위기 속에서 대신교단의 정체성은 사라지는 것이 기정 사실”이라며 반대를 표했다. 

같은 해 합동과 개혁은 통합에 성공했다. 사실상 영입 형태인 교단 통합을 예장 개혁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배경에는 자체적으로 신학교 운영이 어렵다는 점, 교단 신학교의 존폐 위기는 교단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 강하게 작용했다. 

2009년 통합-합동정통 16차례 합동 논의
백석총회는 2013년 이전까지 대신하고만 통합을 추진했을까? 최순직, 김준삼 목사와의 인연으로 인해서 예장 대신과 통합 논의가 잦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대신하고만 통합을 논의한 것은 아니다. 

2005년 성사된 합동과 개혁의 통합은 한국교회 안에 “가능한 합쳐야 한다”는 통합의 당위성을 확산시켰다. 한국 장로교단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교리와 신학이 같은 장로교단 간 통합 추진이 논의됐고,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예장 통합이 합동정통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첫 만남은 ‘건강한 교류’로 시작했다. 2009년 예장 통합 총회장은 김삼환 목사였고 ‘장로교통합을위한위원회’ 위원장은 박종순 목사였다. 합동정통 총회장은 장원기 목사였고, 교류추진위원회 위원장은 최낙중 목사였다. 2009년 1월 양 교단 임원 상견례를 시작으로 강단교류와 실무자 모임을 이어왔고, 교단 통합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위원회까지 구성한 후 2009년 7월 28일 ‘합동정통-통합 교단 일치와 화합을 위한 대화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장충동 앰버서더호텔에서 통합모임을 가졌다. 

이날 예장 통합 김삼환 총회장은 “올해는 통합과 합동이 갈라진 지 50년 되는 해로 희년을 맞아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야할 책임이 있는 시간”이라며 “장로교 안에 있는 모든 지도자들이 모여 대화하고 연합하는 일에 한 걸음씩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모두발언을 했다. 

이에 화답한 합동정통 장원기 총회장은 “장로교 일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어 합동정통과 통합이 첫 단추를 끼우게 된 것에 감사를 표한다”며 “머리를 맞대고 최선을 다해 좋은 방향으로 이뤄내도록 힘을 합하자”고 제안했다. 

1월부터 교류를 진행하면서 대화는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7월 앰버서더 모임에서는 9월 총회 공동개회예배와 성만찬 등에 합의했다. 교단통합을 위한 5인위원회도 구성했다. 합동정통 5인위원회는 최낙중 교류위원장과 유만석 부총회장, 이영주 서기, 조병선 총무, 고영민 총장 등이 선임됐으며, 통합에서는 박종순 연합위원장과 지용수 부총회장, 이성희 서기, 조성기 사무총장과 더불어 한목협 회장을 맡고 있는 손인웅 목사가 포함됐다. 총 16차례나 모임을 가지면서 논의를 진전시켰다. 

9월 총회 한 달 전, 예장 통합 김삼환 목사는 기자회견에서 “제93회 총회 결의 중 타 장로교단과의 교단 통합문제에 대한 연구 결과, 합동정통 교단과의 교단 통합의 초석을 마련하는 일을 제93회기 상반기부터 추진해 현재 양 교단 총회 임원 간의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왔고, 계속적인 교류 과정을 통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교단 통합의 초석을 준비하고 있다”며 교단통합 파트너로 합동정통 총회를 선택했음을 밝혔다. 

9월 총회 개회를 양 교단 연합으로 추진하자는 안까지 오갔지만 실제로 9월 총회는 각각 치러졌다. 일종의 숨 고르기였다. 

2009년 ‘백석’으로 이름 바꾸며 상승
마치 유행처럼 번진 ‘교단 통합’의 물결 속에서 합동정통 몸값은 상한가를 찍었다. 합동과 개혁의 교단통합을 목격한 장로교단들은 너도나도 통합에 열을 올렸다. 아이굿뉴스 2009년 9월 15일자에는 <통합-합동-고신 ‘교단통합 무한경쟁?’>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보도에 따르면 예장 통합은 합동정통, 기장, 합신 등 3개 교단을, 합동은 합동정통, 고신, 대신, 합신, 웨신 등 5개 교단을, 고신은 고려, 합동정통, 합신 등 3개 교단을 물망에 올려놓고 통합을 모색한다는 것. 1위 교단을 둘러싼 합동과 통합의 자존심 싸움, 대형교단의 몸집 불리기 속에서 도태되고 싶지 않은 중형 교단의 경쟁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했다. 

당시 3천500교회로 중형교단이면서 백석대학교라는 건실한 교육기관이 있다는 점은 합동정통을 통합 파트너 1순위로 꼽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합동정통 내부에서는 교단 정체성 강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2009년 9월 열린 정기총회에서 교단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한다. 한국장로교 총회 역사를 쓰던 총회 회기는 1978년 복음총회 설립을 출발점으로 변경됐고, 교단 명칭은 ‘예장 백석’으로 바꾸며 새롭게 태어났다. 그동안 마치 합동의 아류처럼 불리던 기형적인 이름을 버리고 학교와 총회가 ‘백석’이라는 같은 이름 아래 공존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여러 교단들의 잇단 ‘러브콜’을 거절할 수 없었던 백석총회는 ‘장로교단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신학과 교리가 같은 장로교단과 일단 통합 논의를 계속하기로 했다. 

그런데 교단 명칭을 ‘백석’으로 바꾼 총회는 대외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통합을 주도하는 입장이 됐다. 통합이나 합동에 흡수될 이유가 없었다. 2010년 1월 예장 웨신과 통합모임을 가졌고, 2011년 다시 예장 대신과 통합 논의를 시작했다. 대신과는 이미 수차례 통합이 무산된 터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교단통합추진위원회 1차 모임에서는 교단통합을 원칙으로 하는 것을 1단계로 하고, 2단계는 양 교단이 연합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며, 3단계는 7월부터 통합 논의를 구체화하기로 했다. 

당시 총회장이던 박재열 목사는 “70%가 통합에 찬성하고 10%가 반대한다. 중도층을 끌어들여 90% 이상 찬성하는 통합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부총회장 강경원 목사의 입장은 달랐다. 강경원 목사는 “교단 통합 문제는 여러 번 등장했고, 그때마다 내홍을 겪었다”며 신중론을 펼쳤다. 

2015년 대신과 통합을 이루기까지 정말 수많은 대화와 합의가 오갔다. 큰 틀에서 대신을 존중하는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대신 내부에서는 “왜 통합을 해야 하냐”는 반대그룹이 여전히 변수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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