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료실에서 거짓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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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진료실에서 거짓말을?
  • 송태호 원장
  • 승인 2020.04.01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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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사 송태호의 건강한 삶 행복한 신앙-24

몇 년 전 본 ‘거짓말의 발명’이란 코미디 영화가 문득 생각났다. 국내에서 개봉되지 않은 영국 영화인데 거짓말을 모르는 사회에서 여러 가지로 매력이 없는 주인공이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다. 이 사회에서는 첫 데이트에 나선 여자가 남자의 면전에서 ‘당신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회사원이 상사 면전에서 ‘재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 말에 상처받고 걱정하지만 아무도 자신이나 상대방을 속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본의가 아닌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한다. 주인공의 거짓말은 전능하다. 술을 마시고 운전해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말만으로 무사통과된다. 통장에 한 푼도 없지만 ‘돈이 통장에 있으니 인출해달라’고 하면 은행에서 돈을 준다. 무엇이든 진짜라고 믿는 사회에서 주인공이 거짓말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을 보면서, 가식과 허례가 만연한 현대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자 하는 이 영화를 통해 나는 거짓이 난무하는 진료실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환자나 의사나 모두 만만치 않은 거짓말쟁이들이다. 의사들은 개인 사정으로 인한 휴진도 꼭 세미나 참석이나 강의 때문이라고 한다. 내시경상 누가 봐도 확연한 위암도 조직검사 전까진 잘 모르겠다고 하는 선의의 거짓말도 물론 있기도 하다. 의사가 잘 모르거나 잘 하지 못하는 것도 환자들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초등학생들이 배가 아파 병원에 오면 무조건 별로 아프지 않다고 우긴다. 꽤 아파 보여도 아프지 않다고 거짓으로 우기는 이유는 혹시라도 주사를 맞을까봐 무섭기 때문이다. 학기 중 10대 고등학생이 오전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 온 몸과 목이 아프다고 했다. 진찰해 보니 열도 없고 목도 정상이었다. 특별한 치료가 필요없다고 말했더니 그래도 처방전을 달란다. 병원에 오느라 학교에 늦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처방전을 학교에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이 아파서 병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학교 제출용 처방전이라는 면죄부를 받으러 온 것이다. 이런 꾀병 환자는 의외로 많아서 중고등학생의 경우만이 아니라 대학생들인 경우도, 심지어 직장인인 경우도 있다. 

이처럼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경우와는 반대로 자신이 손해인데도 진료실에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환자들도 많다. 당뇨환자들은 정기 진료 때에 혈당을 측정하고 이를 토대로 의사와 앞으로의 관리에 대해 의논하게 되는데, 어떤 환자들은 평소에는 식이요법을 전혀 하지 않다가 병원 방문일이 가까워지면 그 때 비로소 식이요법을 한다. 병원에는 물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와서 혈당을 측정한다. 그래도 혈당치가 높은 경우 의사에게 식후 혈당이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약 복용을 게을리 한 고혈압 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혈압이 높게 측정되면 무리했다고 하거나 음식을 짜게 먹었다고 한다. 

환자 세계에서 최고의 거짓말쟁이를 꼽으라면 당연히 알코올성 간염환자를 꼽는다. 의사생활 20여 년 동안 자신의 주량을 그대로 실토하는 환자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꼭 가족의 진술이 필요한데, 문제는 가족은 의사에게 환자의 상태를 심각하게 전달하여 강력하고 효과가 좋은 치료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환자의 주량을 늘려서 이야기하는 거짓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의사는 이 두 거짓말 사이에서 적절히 알아 듣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의사는 자신의 진찰과 환자의 말을 토대로 치료하기 때문에 환자의 말에 의존하게 된다. 진찰 결과만큼이나 환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의사라도 환자가 ‘나는 건강하다. 나는 별 문제없다. 나에게 자꾸 식이요법이나 운동을 강요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면 황당하다.

최근의 코로나 사태도 마찬가지다. 열이 나는 환자에게 해외 방문력이나 신천지 신도인지 물어보면 아주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 분에게는 불쾌한 질문이었을지 모르지만 의사의 입장에서는 모든 환자에게 병력을 물어보는 것은 당연하다. 대구에서 올라온 환자가 사실을 숨기고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병원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도 있었다. 이 경우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해를 끼친 경우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거짓말을 하는 환자들이 이해가 안 되는 의사의 입장에서 진료실에서 필요한 검사장비의 목록에 거짓말 탐지기가 추가돼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내과 원장·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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