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과 여성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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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과 여성안수
  • 승인 2004.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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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종교수의 바울서신 해석 여성성직, 성경적 교훈안에서 시대상황 고려해야

신약성경 저자들 가운데 여성에 관한 가장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여성의 안수를 지지하고 있는가, 반대하고 있는가?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신학자들은 사도바울의 말을 예화로 즐겨 사용한다. 반면 여성신학자 역시 바울이 여성임직을 찬성한다고 주장한다. 본지가 지난 주 연재한 연합토론 ‘여성안수 어떻게 보십니까’를 지켜본 천안대학교 최갑종교수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다양한 교훈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통해 현시대에서 여성안수에 대한 해법을 찾아 원고로 보내왔다.

여성에 대한 바울의 교훈은 다양하며, 어떤 교훈들은 상반된 교훈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4,35절과 디모데전서 2:10,11절 등에서는 교회에서 여자들이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강하게 금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1:3-10절에서는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머리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의 성직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러한 구절들을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옹호하고, 여성의 성직 안수를 지지하는 것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근거로 삼는다. 반면에 여성의 성직을 찬성하는 자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7:1-7절에서는 부부의 동등성을, 고린도전서 11:11-12절, 갈라디아서 3:28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동등성을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

바울 서신에 나타나 있는 이와 같은 다양한 교훈들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 것인가? 우리가 전자의 교훈만을 보고 후자의 교훈을 보지 못한다면, 마치 바울은 여성의 임직을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반대로 후자만을 보고 전자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마치 바울이 무조건적으로 여성의 임직을 옹호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이 여성 문제와 관련하여 이와 같은 다양성 있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아 바울은 이렇다, 저렇다고 쉽게 단정을 내릴 수 없다.

다양한 교훈 쉽게 단정 못해

고린도전서 11,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의 본문에 근거를 두고 여성의 성직을 단호하게 반대하는 자들은, 바울이 그 어떤 서신에서보다도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체계적으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로마서에서 왜 그와 같은 교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지를, 왜 바울이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는 여성에 대한 그와 같은 강한 부정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지를, 왜 바울이 로마서 16장과 갈라디아서 3:28절, 고린도전서 7장과 11장 10-11절에서 주 안에서 남녀의 동등성을 강하게 옹호하고 있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며, 여성의 임직을 찬성하는 자들은, 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서 교회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가를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본문들이 주어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황은 물론 이러한 본문들이 놓여져 있는 전후 문맥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요청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왜 디모데전서 2장에서 그와 같은 교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본문을 오늘 우리교회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남자 교우들과는 달리 고린도교회 여 교우들을 향해 공 예배시에 머리에 수건 같은 것을 쓸 것을 강력하게 권하고 있다. 바울이 이와 같은 특수한 교훈을 고린도교회에 주는 이유는 이 문제가 당시 고린도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특수한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정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한다는 바울의 특수한 교훈도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든 여 교우들을 향해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에 참석하라고 권면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교회가 처해 있는 문화적, 사회적 정황은 고린도교회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바울의 본문으로부터 우리의 공 예배시에 가져야할 합당한 태도에 있어서 우리 교회가 처해있는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의 서신들은 그것에 합당한 해석학적 과정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소위 여성 임직을 반대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본문들이나, 혹은 그 반대로 여성의 임직을 찬성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본문들도 이점에 있어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사실상 우리가 해석학적인 과정 없이 바울의 어떤 서신들을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바울의 진정한 의도를 떠날 수도 있다.

남여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

이런 해석학적인 과정과 함께 또한 우리가 깊이 유념하여야 할 것은 바울의 어떤 특수한 서신의 구절들을 해석할 때 이 구절들을 바울의 일반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아무리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교훈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어떤 점에서는 바울의 문제라기보다도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을 깊이 연구하면, 바울의 신학을 묶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중심 사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창조”, “타락”, “구속”, “새 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입각한 종말론과, 이 종말론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그의 기독론과 성령론이다. 바울은 인간과 세계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고 있다.

여성의 성직 문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남녀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사회의 문제들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였고, 죄로 오염되었으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속되었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새 창조는 단순히 아담의 타락이전으로 복귀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이전보다 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창조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원문의 뜻은 ‘새로운 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선언할 때, 이것은 그야말로 옛 창조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역시 갈라디아서 6: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원문의 뜻은 ‘새 창조’) 만이 중요하니라”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이 새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갈라디아서 3: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표현하였다.

구약관점 현시대 적용은 무리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여성의 성직 문제를 첫 창조나 구약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여성의 성직 문제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아야할 것을 가르쳐준다. 사실상 바울은 그의 목회와 선교사역에 있어서 그가 살고 있던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위주의 문화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여성사역자들을 동참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창조를 이미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새 창조는 아직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비록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적인 것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강한 부정적인 교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 역시 바울의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새 창조세계)와 “아직”(옛 창조세계)이 함께 공존한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직”이라는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구조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는 없을 뿐더러 오히려 때때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들 중에 적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 체험을 통하여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부부 생활과 결혼까지 거부하고, 교회 안에서 당시 고린도교회가 처해 있었던 문화와 사회적 정황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구조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무질서는 물론 교회의 선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여성교우들에게 특수한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원리적으로 남자와 똑같이 여성의 임무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특수한 교회의 상황에서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 그것은 유보되거나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만 본다면 바울이 여성의 임직을 반대하고 있다고 해서 바울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나오는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교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신학자들이, 마치 바울이 어떤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정황을 초월하여 무조건적으로 여성의 임직을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확대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바울이 여성임직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처럼 확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쪽의 극단적인 주장은 다같이 바울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상황에 맞는 ‘때’를 기다려야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어떤 교회나 교파가 여성의 성직을 허용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비성경적인 것으로 매도하여서도 아니될 것이며, 그 반대로 어떤 교회나 교파가 여성의 성직을 반대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역시 성경의 교훈을 떠나는 것으로 완전히 매도하여서도 아니될 것이다. 어떤 교회나 교단에서 모든 문화적, 사회적 여건과 교회나 교단의 상황을 감안하여 여성의 성직 안수가 교회나 교단의 발전은 물론 사회나 문화를 새롭게 변혁시켜 가는 데 기여가 될 것으로 확신하여 여성의 안수를 허용한다고 해서 사도 바울의 교훈을 벗어난다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안수가 그 교회나 교단의 덕이 되지 못하고 교회나 교단의 분리를 촉진할 가능성이 있어 모든 여건이 성숙할 때가지 기다린다고 해서 사도 바울의 교훈을 벗어난다고 말할 수 없다.

최갑종/천안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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