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없는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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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없는 영광
  • 승인 2004.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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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노력 없는 성공, 과정 없는 결과를 얻어 내는 것을 오히려 지혜롭고 선하게 여기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아무 노력 없이 하루 아침에 일확천금을 꿈꾸며 어떻게 해서든지 줄을 잘 서고 처세술을 강구하여 올라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못하는 인간들은 실패자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을 타락으로 이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도 이런 한탕주의 공짜주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간디는 말하기를 ‘희생 없는 축복을 원할 때 그 종교는 타락한다’고 했다. 간디가 지적한 대로 희생 없는 축복을 원하므로 타락되어가는 신앙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날까?

주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고난은 외면하고 내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부활은 원하면서도 죽음을 통과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달라는 것은 많아도 주님에게는 하나도 내어드리지 않는다. 말로는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지만 생활이 조금만 불편해도 불같이 화를 내며 이런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머리로는 봉사와 희생을 찬미하지만 몸으로 봉사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긴다.

문제는 이런 삶 속에서는 결코 능력이 나타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자는 결코 성령의 선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의 온유함을 자랑하지만 충성 된 자를 누가 찾을 수 있겠느냐.’ 성경의 탄식은 바로 이런 희생 없는 축복을 원하는 자들을 향한 탄식이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삶이 지혜롭다고 여길지 모르나 사실은 인생을 빈 알맹이로 만드는 사단의 속임수에 걸려있는 것을 모른다. 왜냐하면 실제로 죽지 않는 자는 부활의 의미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희생하지 않을 때 사랑의 가치를 알 수 없고, 손해 보지 않는 자는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으며, 자기의 것을 드리지 않는 자는 자족함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이것이 주님의 모사, 사랑의 법칙이다.

금년 고난주간을 전후해 화제 거리였던 ‘The Passion of Christ’는 어떤 엽기적 영화보다 더 엽기적일 만큼 잔혹했다. 충격적인 것은 이것이 지나친 과장과 상상이 아닌 거의 사실에 가까운 장면들을 재현해 냈다는 점이다. 실제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기로 결심하신 주님에게 인간은 사악한 모든 짓을 자행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처럼 이 영화의 핵심은 고난이 아니라 열정이었다. 사랑에 대한 열정, 그 열정 때문에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감당하신 고난인 것이다. 그 찢겨짐이 있었기에 치유가 있고 잔혹한 멸시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존귀함이 올수가 있었다.

이런 성결한 사랑을 바로 안다면 어떻게 이 세상의 한탕주의 문화에 오염되어 희생 없는 영광만을 바라는 신앙인이 될 수 있겠는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 욕심을 키워가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것은 자기밖에 없다는 불치병에 빠져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기도한다. 조국의 교회 안에는 이런 병이 깊어지지 않기를. 희생의 맛이 어떤 것인지 성도들이 알기를 원하며 남이 모르는 봉사 속에서 맛보는 주님의 위로가 어떤 것인지 성도들이 알기를 원한다. 누가 알아주지 아니할지라도 주께서 우리 교회에 맡기신 그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서로가 불편하고 힘들지라도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더 큰 것을 위한 선택을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기를….

그것이 가장 현명하고 잘 사는 삶임을 주님은 말하고 계신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주서택/목사․청주 주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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