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룡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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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룡천인가?
  • 승인 2004.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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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1백47개 군 가운데 룡천에서 철도폭발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건물들이 파괴된 것은 우연일까?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우연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왜 룡천인가?’ 이 문제의 답을 찾는데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룡천이 해방 전에 교회 밀집도가 유난히 높아 룡천군의 교회들로 용천노회가 조직되어, 한국 교회사에서 전무후무한 1군 1노회(一郡一老會)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룡천과 교회에 대해 살펴보노라면 ‘룡천군은 교회군’이라는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온다. 그만큼 룡천에는 교회가 많았고, 교회에서 세운 교육기관들도 많았고, 교회와 민족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고, 교회의 영향력이 강했다.

‘기독교연합신문’이 지난 5월2일 자 신문에 “평북 용천 ‘조선의 예루살렘’: 해방 전 기독교 민족운동 중심”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1면 사이드 톱으로 다룬 것은 크게 칭찬 받을 일 가운데 하나다(필자는 이 기사를 교회 주보에 그대로 옮겨 실었다).

이 때문에 북한의 공산화 초기 과정에서 룡천 기독교인들은 북한 당국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1945년 11월16일, 룡천의 용암포에서는 기독교사회민주당 용암포 지부 결성대회가 열렸는데 공산당원으로 보이는 용암포 경금속 공장 노동자들이 대회장을 습격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이 일은 신의주 학생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기혁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용암포제일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고 장로 한 사람이 피살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 후 북한교회의 대표적인 저항으로 꼽히는 리만화목사 사건도 룡천에서 일어난 일이다. 리만화목사 사건은 리만화목사가 룡천에서 농장원으로 생활하면서 교인들을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게 했는데, 이들이 1957년 8월에 있었던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의 투표를 거부하여 대규모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리만화목사가 교인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진 출두하여 처형된 일을 말한다.

‘왜 룡천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이 때문일 것이오!’ 라며 여러 이유를 들 수 있다. 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지금 하면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을 절제하면서 위로와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을 모으자.

그러나 다른 곳이 아니고 룡천에서 이번 사고가 나서 룡천이라는 지명이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고 교회 안팎에서 룡천은 교회가 많았던 곳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되면서 북한의 교회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 룡천뿐이겠는가? 선천이 있고 의주가 있고, 그리고 평양도 빼놓을 수 없다. 해방 전 교회는 북녘 지역에서 묵직한 비중을 차지하고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룡천 폭발사고를 계기로, 둔화되어 가는 북한선교와 북한교회 재건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자. 그것은 ‘왜 룡천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답이 될 것이다. 룡천과 교회의 관계를 알고서도 ‘왜 룡천인가?’ 라는 질문을 갖지 않거나 앞에서 말한 초보적인 답조차 얻지 못한다면, 그는 또 그 교회는 분단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는 좌표를 상실한 존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관지/목사·목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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