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교회 역사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이방전도의 중심지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기독교는 당시 세계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지금의 터키의 안타키야라는 도시이다.
안디옥은 알렉산더대왕 휘하의 장군 중의 한 사람인 셀류쿠스(Seleucus Nicator, BC 312~280)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그는 자기 아버지의 이름 안티오쿠스(Antiochus, 안디옥)를 따라 이 도시의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선박이 통행할 수 있는 오론테스(Orontes) 강을 따라 24킬로미터 서쪽에 있는 그 도시의 항구는 자기 이름을 따라 셀류키아(Seleucia, 실루기아)라고 명명했다.
안디옥은 기원전 64년에는 폼페이(Pompey)에 의해 로마제국에 흡수되었고, 시리아(수리아)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요세푸스는 이 도시를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 도시’라고 불렀는데, 다인종적 도시였다. 상업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남쪽으로는 팔레스틴과 이집트로 연결되어 있었고, 북쪽으로는 소아시아에 이르는 통로였다. 오른테스강을 따라 실루기아에 이르면 이 항구도시를 통해 당시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행 13:4). 그래서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곳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안디옥에서의 기독교와 관련된 최초의 언급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행 6:5)라는 누가의 기록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해 갔을 때 사도들이 공궤하는 일에 메여있을 수 없으므로 이 일을 대신할 일곱 사람을 택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니골라였다. 안디옥에 사는 이방인이었던 그는 유대교로 개종하였고, 후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초기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개종 이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는 기독교의 확산을 가져왔는데(행 11:19), 이들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베니게 해안을 따라 올라가던 몇몇 헬라파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렀고, 이들에 의해 안디옥에도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안디옥의 신자들은 급증해 갔다. “수다한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고”(행 11:21), 바나바의 사역의 결과로 “큰 무리가 주께 더하였다”(행 11:24).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 도움을 구한 것이나, 바나바와 사울이 일 년간 함께 일하며 “큰 무리”(행 11:26)를 가르쳤던 것으로 보아, 그리고 글라우디우스(Claudius, 재임 41~54년) 치하의 대기근으로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구제기금을 보낸 것을 보면 교세가 상당했던 곳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신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οι, Christianoi)이라고 불렸다(행 11:26). 이때가 30년대 후반이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메시아인데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안디옥의 신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초기 신자들을 유대교의 한 종파이거나, 유대교의 이단으로 보아 후일 ‘나사렛 이단’ 혹은 ‘나사렛당’(Nazaraeans)이라고 불렀다(행 24:5).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로마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Christianoi의 어미 -ianoi는 라틴어 어미 -iani의 헬라어역으로서 “따르는 자,” 혹은 “추종자”라는 뜻이다. 예컨대, 헤롯을 추종하는 자는 Herodianoi(막 3:6)라고 불렸고, 아우구스투스를 따르는 자는 Augustiani라고 불렀다. 그리스도 당파라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초기 신자들이 이 용어를 선호하지 않았고, 신약성경에서 오직 2번 사용되었을 뿐이다(행 26:28, 벧전 4:16).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⑥ - 안디옥으로 전파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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