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선언(1) (15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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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선언(1) (1531년)
  • 주도홍 교수
  • 승인 2020.02.1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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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의 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 -80

유언 같은 글

츠빙글리는 1531년 10월 11일 카펠 전투에서 교황청의 군인들에 의해 목 베임을 받아 4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몇 달 전, 그해 여름 츠빙글리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기독교 신앙선언’(fidei expositio, 1531년)으로 자신의 신앙을 설명했다. 유언과 같은 이 글은 츠빙글리 사상과 그 실천을 보여주는 마지막 열매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루터와 첨예하게 길을 달리했던 츠빙글리의 성찬 이론은 실천적으로 예전을 통해 제시된다. 이는 이론과 실천을 통해 개혁교회의 예전의 완성을 보여주는 츠빙글리의 탁월성이라 하겠다. L. P. Wandel은 츠빙글리의 의의를 평가하였다.

“츠빙글리가 여기서 재정립했던 교회와 공적 생활의 상관성에 대해 당시 동료들은 교회가 너무 정치적이지 않은지 미더워하기도 했지만, 츠빙글리의 사상은 칼빈의 특별한 교회 개념화의 근거를 제공했다. 츠빙글리의 성찬 이해 역시, 루터가 아주 싫어해서,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많은 개신교 예전에 스며들었다. 영국 국교회 예전의 직접적 원천이기도 했다. 츠빙글리 교회는 없지만, 그의 신학은 개혁교회 전통을 근원적으로 형성했다. 정치를 향한 교회의 관심, 적극적 윤리의식, 속성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임재, 세상에서 일하는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섭리에 대한 이해를 들 수 있다.”
 

고립된 츠빙글리 

앞에서 다루었지만, 츠빙글리는 1년 전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자신의 신앙을 ‘신앙 해명’(fidei ratio)을 제출했다. 황제 칼 5세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이 여러 면에서 다름을 확인하였다. 독일 루터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은 남부 독일과 스위스 츠빙글리의 ‘신앙 해명’(1530년)과의 차이를 확연히 드러냈다. 독일 루터교회는 츠빙글리의 입장을 반대했다. 이후 교황과 황제는 적대관계에 놓였을 뿐 아니라,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의 관계도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루터의 성찬 이해에 대한 츠빙글리의 강한 비판은 개신교 동맹에 큰 타격을 주었다. 1531년 초 츠빙글리와 프랑스 사이 새로운 협상이 시작되었고, 츠빙글리는 1531년 여름 ‘신앙선언’(fidei expositio)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게 되었다. 당시 츠빙글리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꼭 정치적이라 말 할 수 있을지, 묻게 된다. 만약 그의 신학이 이전과 비교할 때 달라졌다면, 얼마든지 츠빙글리 신학의 일관성을 물으며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왕에게 쓴 편지

츠빙글리는 ‘신앙선언’을 시작하기 전, ‘가장 훌륭한 왕’ 프랑수아 1세에게 편지를 썼다. 왕이 츠빙글리를 향해 가지고 있을 선입견과 편견을 무마시키고자 하는데, 두 쪽 분량이다. 츠빙글리는 자신이 사는 시대 100년을 거짓말이 난무하는 혼란의 시대로 부르며, 이러한 격동의 위기 가운데도 하나님은 스파르타 훈련처럼,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을 양성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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