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 감성전도사? 이젠 복음으로 희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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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 감성전도사? 이젠 복음으로 희망을 전합니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0.02.05 10: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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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청소년 살리는 찬양사역자 김관호 강도사

허스키한 목소리에 R&B 창법의 현란한 기교,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호소력까지. 얼핏 달달한 사랑 노래가 들려올 것만 같지만 의외의 가사가 흘러나온다. “끝없는 바다와 같은 한없는 주님의 사랑. 끝없는 하늘과 같은 한없는 은혜의 사랑. 내 맘에 부으시네. 내 맘에 채우시네.” TV 프로그램 너의 목소리가 보여감성 전도사로 출연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실력자 김관호 강도사의 삶이 담긴 고백이다.

무대 위 대중들의 환호성 앞에 선 가수를 동경하던 꿈 많은 청년이 이젠 관중석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찬양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김관호 강도사를 지난달 22일 인천에서 만났다.

 

일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리나

타고난 노래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음치에 아버지는 박치, 노래로 따지면 흙수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노래를 너무 사랑했던 소년은 포기를 몰랐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래했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연습에 몰두하다보면 10시간을 넘기는 것은 일상이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볕들 날이 오는 것만 같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노래를 꾸준히 올리다보니 연예기획사 한 곳에서 연락이 온 것. 부활과 시나위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그룹들이 소속돼있는 회사였다. 곡을 받고 공연을 다니기 시작하니 가수의 꿈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히는 듯 싶었다. 구름 같은 대중들 앞에 서서 목이 터져라 열창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정식 데뷔를 하려면 투자가 필요했어요. 사장님이 저에게 너 돈 좀 있냐고 물어보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그때 전 생활보호대상자였거든요. 국가보조금을 받으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다 잡았다고 생각한 가수의 꿈이 멀어지는 것 같았죠.”

어떻게든 기회를 잡으려 시나위 보컬로도 오디션을 봤다. 하지만 R&B 스타일이 짙은 그의 음색은 거친 록 음악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다른 오디션에서도 데뷔의 기회는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때 어깨너머로 투자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김관호 강도사가 아니었다. 지금은 톱스타로 우뚝 선 가수 이승기 씨가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누난 내 여자니까라는 노래로 데뷔하자마자 대박을 터뜨리는 모습을 김 강도사는 씁쓸하게 지켜봐야 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도 현실은 유난히 그에게 더 혹독했다. 예능 프로그램 OST를 부를 기회를 얻었지만 두 달도 안 돼 프로그램이 사라졌다. 간절한 마음으로 참여했던 오디션은 그날따라 얄밉게 찾아온 성대결절로 망쳐버렸다. 일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가 있나 싶었다. 그때 불현 듯 고3 시절 했던 기도가 생각났다. “저에게 목소리를 주신다면 평생 찬양하다 죽고 싶다던 뜨거운 고백이었다.

고등학교 땐 정말 미친 듯이 연습했어요. 가정환경이 정말 안 좋았고 집안이 풍비박산 이다보니 노래가 유일한 희망이자 숨 쉴 구멍이었거든요. 밥 챙겨 먹을 돈이 없어 위궤양으로 쓰러지자 술도 안 마시는데 주변에서 너 술 좀 그만 마시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렇게 간절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인정해주자 그 기도를 까맣게 잊었었습니다. 가요계에 몸을 담은 지 10, 일이 안 풀려 좌절에 빠져있을 때 그 간절했던 기도가 생각이 나더군요.”

 

하나님의 동아줄

때마침 CCM 앨범을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다. 이실라 신선호 등 CCM 뮤지션들이 참여한 주보혈 워십음반이었다. 그때부터 김관호 강도사의 노래의 길은 180도 달라졌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한다는 것도 좋았지만 김 강도사 자신에게도 위로가 됐다.

가요계에서 녹음실은 마이크가 날아오고 쌍욕이 날아오는 공간이었는데 CCM 제작 현장은 전혀 달랐습니다. 녹음 전에 기도로 시작했고 끝나면 칭찬이 쏟아졌죠. 앨범에 참여한 것도 좋았지만 그 현장의 모습이 제게 많은 힘이 됐습니다.”

김 강도사가 찬양사역을 시작하자 가장 기뻐했던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그의 찬양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아내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자동차를 팔아 음반을 내줬다. 5곡의 찬양이 담긴 그의 첫 CCM 음반. 일반적인 교회 음악과 달랐던 그의 곡들은 당시 싸이월드에서 인기를 끌었다.

음반이 이슈가 되자 몇몇 집회에서 초청을 받았어요. 그런데 찬양집회는 노래만 부르고 오면 되는 곳이 아니더군요. 그때의 전 노래만 부를 줄 알았지 집회 현장에서 간증을 나눌 줄도 몰랐고 자연스럽게 진행할 줄도 몰랐죠. 두 번 집회현장을 어색하게 끝내니 요청이 뚝 끊겨버렸어요.”

그런 그에게 찬양 사역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가 찾아왔다. 찬양 버스킹을 하던 중 크리스천 가수 커피소년(노아람)을 만나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분이 제 얘기를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고, 자기 아버지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누구신가 했더니 CCM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노문환 목사님이셨죠. 노문환 목사님은 절 중국으로 데리고 다니시며 찬양사역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나중엔 일본에서 단독사역의 길도 연결해 주셨죠.”

해외에서 집회 요청이 많아지며 길이 열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잦은 외국 출장에 홀로 남아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아내는 지쳐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2014년쯤 외환위기로 엔화 가치가 급락했다. 일본에서 받는 사역비로 생활을 이어가던 김 강도사 가정에게는 뼈아픈 일이었다. 찬양사역을 시작한 후 찾아온 가장 큰 위기였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듯 설움을 토해냈어요. ‘뭡니까 이게. 하나님께서 절 찬양사역으로 인도하셨는데 우리 가족 건사도 못하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주저앉아 속상하고 섭섭하다고 부르짖었죠. 그때 응답처럼 온 것이 바로 너목보(너의 목소리가 보여)였습니다.”

김관호 강도사에게 너목보는 동아줄이었다. 삶의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가고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온 응답이기도 했다. ‘감성전도사라는 이름으로 출연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며 노래했다. 가요계와 찬양사역자로 탄탄히 다져온 실력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포털사이트에서 그의 출연 영상들의 조회수는 100만을 훌쩍 넘겼다.

녹화가 끝나고 인터뷰에서 음악 목사가 되고 싶다고, 소외된 사람들을 치유하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많이 편집이 됐지만 그래도 음악 목사가 되고 싶다는 인터뷰는 방송됐죠. 그때 이후로 기독교 매체에서 연락이 오고 한국교회에서 저를 불러주기 시작했어요. 자연스레 제 사역의 현장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일본에서의 찬양사역 훈련은 한국에서 사역하는데 든든한 밑거름이 됐죠. 모든 과정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밖에 고백할 수 없어요.”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라

별을 만드는 사람들 인천 센터장찬양사역자로 기억되는 김관호 강도사의 명함에 새겨진 또 다른 이름이다. ‘별만사는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는 비영리단체. 그가 위기 청소년 사역에 뛰어든 이유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 때문이다.

저부터가 어렸을 때 너무 어려웠어요.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IMF로 부도가 나서 30억의 빚을 진 것이 시작이었죠. 경찰이 아버지를 10년간 쫓아다니고 빚쟁이들은 제 학교까지 찾아와 협박했습니다. 경찰은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뭐 꼬투리 잡을 게 없나 가방을 뒤졌어요. 그때 어른들에 대한 분노와 설움이 많이 쌓였죠. 차비가 없어 걸어 다닌 등굣길에 아무도 없는 터널을 지날 때면 혼자 노래를 부르며 많이 울었습니다.”

일진교회 임귀복 목사가 연결해준 아이들을 화곡동에서 만난 것이 청소년 사역의 시작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려 교회로 향하는데 놀랍게도 교회의 위치는 그가 등굣길에 지나던 그 터널의 바로 옆에 있었다. 감정이 복받쳤다. 하나님께서 네가 그때 여기서 눈물을 흘렸듯 지금 울고 있는 이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렴하고 말씀하시는 듯 했다.

김 강도사가 청소년 사역에 나선 데는 어머니의 영향도 적지 않다. “저희 어머니가 사실 개척교회 목사님이세요. 목회하며 고아와 한부모가정 아이들 13명을 14년 동안 돌보셨죠.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되고 마지막 한 명만 남았을 때도 그 한 명을 데리고 여름성경학교를 하셨어요. 어머니의 사역과 기도가 지금의 청소년 사역으로 이끌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랜 기간 이어온 찬양사역에 비하면 아직 청소년 사역의 범위는 크지 않다. 지난해 5월 인천 별만사 센터를 개소하고 한 명 두 명 찾아오는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올해부터는 국선보조인 자격을 얻어 법원에서 재판받는 아이들을 만나 상담하며 복음을 전한다. 찬양사역자로, 또 청소년사역자로 두 갈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그는 또 어떤 비전을 꿈꾸고 있을까.

예전엔 거창한 계획을 많이 세웠었죠. 하지만 지금은 제 삶에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해내려 조바심을 내던 삶에서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삶으로 훈련받고 있어요. 앞으로도 제가 만난 하나님과 그 놀라운 은혜가 제 찬양을 통해, 그리고 청소년 사역을 통해 전해질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의 바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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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희 2020-02-05 17:50:53
김관호 강도사님의 사역을 응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