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로역정(人路歷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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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로역정(人路歷程)’
  • 노경실 작가
  • 승인 2020.02.0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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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창간 32주년 기념 소설

1.
밤을 새워 글을 쓴 탓인지 출판사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덜컹, 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어느 새 창밖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잔 것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출구 쪽으로 갔다. 일산 IC를 지나며 나오는 첫 정류장이 백석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품을 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이 동네에 산 지 22년 째다. 눈을 감고 걸어도 생생하게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무언가 어색한 기운이 들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는데, 길 건너 학원 간판이 ‘사랑 학원’으로 바뀐 것을 보았다. ‘하버드 학원’이었는데. 그러고보니 모든 크고 작은 가게들의 간판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형마켓이 있는 쇼핑몰은 ‘희락 쇼핑’ 극장은 ‘화평 무비’ 은행은 ‘인내 은행’ 모텔은 ‘자비 모텔’ 성형전문 병원은 ‘양선 병원’ 술집은 ‘충성 술집’ 헬스장은 ‘온유 헬스’ 그리고 내가 다니는 교회는 ‘절제 교회’로 바뀌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길을 건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다만 가게들의 이름만 바뀐 것이다. 가로변에 줄 지어 선 메타세콰이어 나무들, 저만치쯤 있는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안녕하세요? 하며 지나가는 동네 주민, 교회 지붕 위에 걸린 십자가, 편의점들(편의점들의 가게 이름도 다 바뀌어 있었다. 사랑 아니면 믿음 이런 것으로)

‘무언가 잘못된 거야.’ 나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다.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분명 나는 현실세계에 있다는 것을 핸드폰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년, 월, 일, 시. 모든 것이 내가 인지하고 있는 시간, 그대로였다.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서 조금 전에 만난 출판사 편집자에게 전화를 했다. ‘선생님, 볼펜 때문에 전화하셨죠? 제가 모르고 선생님 볼펜을 가지고 왔는데, 정말 좋은 볼펜이네요. 선생님 이름도 써 있고요. 선물 받으신 거죠? 택배로 보낼까요? 아니면 다음 미팅 때 드릴까요?’ 그의 너무도 사실적인 말에 나는 마음이 놓였다.

그래, 지금 나의 시공간은 몽땅 사실이야! 그러나... 저 간판들은 무어란 말인가? 나는 피곤을 참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희락쇼핑몰로 들어갔다.

 

2.

쇼핑몰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요란한 소나기소리처럼 쏟아져 나오는 웃음소리, 환호성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나는 입구에 서 있는 안내자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토끼 귀 모양의 분홍 풍선 머리띠를 한 그녀는 웃으며 말해주었다. ‘오늘 우리 회사의 모든 가전제품과 스마트폰, 컴퓨터 등 신제품이 나왔어요. 이제는 일 년만 지나도 지겨워지는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6개월 마다 새 제품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물건들을 보고 환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일났어요. 경쟁사에서 4개월마다 신제품을 출시한대요.’

나는 몰려오는 사람들에 밀려 저절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난장판이었다. 다만 색깔이 더 세련됐다고, 디자인이 좀 더 멋있다고, 스타들이 광고한다고, 새로 나온 물건들을 보고 만지며 기쁨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먼저 구입하느라 소리를 지르거나, 밀치고, 당기며 넘어지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내가 먼저야!”

물건에 중독된 사람들. 빚에 빚을 지는 사람도, 돈이 넘치는 사람도, 6개월 전에 산 물건에 손때도 안 묻은 사람도 오직 새 상품이라는 것에 달려오는 것이었다. 청소년이나 직장인, 노인의 구별없이 희락의 쇼핑몰 안에서 물건을 향해 두 손을 내밀고, 다른 사람을 밀어내며 좋아서 웃고, 먼저 사려고 소리치는 희락의 쇼핑몰.

나는 숨이 막혀 뛰쳐나왔다. 그때 눈에 보인 것이 ‘인내 은행’이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상하게 변한 모든 곳을 다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집에 가도 잠이 오지 않을 것 아닌가. 은행 안은 조용했다. 이미 의자는 빈 곳이 없고, 서로 어깨가 닿을 만큼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이곳도 희락쇼핑몰처럼 사람들 때문에 공기가 탁해서 숨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가 먼저야!”

모두들 ‘어서 돈을 달라! 순서를 지켜라!’ 하며 온갖 사연으로 고함을 지르고, 울고, 다투는 소리로 귀가 먹먹해졌다.

나는 비좁은 사람들 틈을 뚫고, 겨우 대기번호를 뽑았다. ‘999만 2,345번’ 놀라 다시 뽑았다. ‘999만 2,346번.’ 다시 뽑았다. 이상해서 옆 사람에게 물었다. 중년의 남자는 오래 기다린 탓인지 아주 피곤해 보였다. ‘죄송하지만 선생님은 몇 번이신가요? 나는 110만 2,345번이라서요.’ 그러자 남자가 웃으며 자기 표를 보여주었다. ‘99만 8,765번’ ‘아니, 그럼 선생님은 언제부터 기다린 거죠?’ ‘오늘로 3개월 째입니다.’ ‘그럼 내일 이 은행에 온다는 건지요?’ ‘은행법을 아직도 모르세요? 적어도 은행 안에 5시간 이상은 머물러 있어야 차례가 오는 겁니다.’ ‘왜 그러는 거죠?’

그때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사람들이 은행에 머무는 시간이 은행의 돈으로 변한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시간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지요. 댁의 번호표가 999만 2,345라고 했지만 너무 실망 말아요. 포기하는 사람들도 종종 나오니까요.’  내가 물었다. ‘카드나 스마트폰이나 입출금기를 사용하면 되잖아요?’ 나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웃었다. ‘이 은행에서는 단 하루라도 돈을 맡기기만 하면 100배를 돌려준다는 걸 모르나요? 하하하’ ‘100배요? 단 하루만 맡겨도?’ 순간, 나도 모르게 솔깃해졌다. 그러나 입금하는 줄의 대기번호도 이미 1000만번이라는 숫자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탁한 공기로 기침이 자꾸 나오고 목도 말라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근처에서 사람들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내가 먼저야!”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 뿐인 여닫이 문 앞에서 서로를 밀어내고, 발로 차고, 머리를 잡아당기며 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건물의 간판을 보았다. ‘자비 모텔’ 나는 나처럼 싸움 구경을 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왜 모두들 모텔 안으로 들어가려고 싸우지요?’ 할머니는 끌고 나온 애완견을 품에 안으며 대답했다. ‘아직도 몰라? 저 모텔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주 저렴한 값에 원하는 모든 행복을 누릴 수 있대. 그래서 자비 모텔이지. 저 모텔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우리 동네 집값이 올라간다잖아. 여하튼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할 수 있는 행복을 저 모텔 안에서 누린대. 혼자 와도, 둘이 와도, 열둘이 와도 괜찮대. 여자끼리 와도, 남자끼리 와도 괜찮대. 그래서 이제는 결혼 같은 거 안 하고도, 애인 없어도, 술집 안 가도 인간이 맛볼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누리게 해주는 자비가 넘치는 모텔이 있어서 다행이라고들 하더라. 그러니까 서로들 먼저 들어가려고 싸우는 거야.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한 달 정도는 걱정 없이 지낸대. 이게 좋은 세상인지, 말세인지 알 수가 없네.’ 할머니는 혀를 차고는 ‘토토야, 집에 가자.’하며 돌아섰다.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경찰들이 왔지만 싸움을 말리지 않고, ‘질서를 지키세요! 성숙한 민주 시민이 됩시다!’ 라는 말만 했다.

모텔 앞을 떠나 얼마 걷지 않은 나는 구토가 몰려와 잠시 벽에 기대섰다. 물이 마시고 싶었다. 하필 편의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살펴보니 내가 기대어 선 벽은 교회 담이었다. ‘절제교회’

나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몰려오는 적막감에 두려움보다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그동안 몇 곳을 들리지 않았는데도 소란스러움과 아귀다툼같은 현장, 비명소리에 구토까지 올라서였을 것이다. 교회 로비 한 쪽에 하얀 정수기가 있어서 나는 배가 부르도록 물을 마셨다. 그제야 머리도 맑아지고, 먹먹한 귀속 울림도 사라지며, 구토증세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아무 생각없이 예배실 앞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교회에 들어서고부터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 것. 교회 안에서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것. 하지만 이내 의문을 풀었다. ‘오늘은 주일이 아니라서 그러나 보구나. 요즘 교회들이 거의 그렇잖아. 이렇게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놓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잖아.’

나는 오늘 겪은 일들에 대해 생각도 하고, 기도도 하고 싶어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천 명은 들어갈 수 있는 예배실은 내가 조금 전 보았던 쇼핑몰이나 은행이나 모텔처럼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상하다. 오늘은 주일이 아닌데.’ 나는 무심코 핸드폰을 열었다. 날짜는 오늘인데 요일은 일요일이라고 써있었다. 이럴 수 없어. 오늘 목요일이라 출판사 미팅을 하고 오는 건데. 이게 무슨 일이지? 혹시 내가 한 가게마다 들린 것이 하루가 지난 건가?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천명이나 되는 교인들과 강단의 목사, 수십 명의 찬양대원들 중 누구도 말을 하거나 찬양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분명히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귀에는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너무 소음에 시달려서 귀가 이상해졌나?’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작게 손바닥을 쳤다. 소리가 들렸다. 목사는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계속 소리치며 설교하지만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천 명의 교인들은 로봇처럼 앞 만 바라보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유령처럼 뒤편에 기대어 서있었다. 설교가 끝나자, 찬양대가 일어나서 입을 벌렸다. 역시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대원들이 연주를 했다. 그러나 역시 내 귀에는 단 한 음절도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예배를 마쳤는지 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웃고, 인사하며 급하게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교회 안은 여전히 내 숨소리만 들리는 적막감에 휩싸였다.

나는 너무 궁금해서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어디를 가는 거죠?’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가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지켜보았다.

“내가 먼저야!”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소리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희락 쇼핑’으로, ‘인내 은행’으로, ‘믿음 고깃집’으로, ‘양선 병원’과 ‘은혜 커피점’으로, ‘온유 헬스’로, ‘화목 골프장’으로... ... 그들이 갈 곳은 너무 많았다.

 

3.

그때, 누군가 뛰어가며 내게 말했다. ‘어서 우리를 따라오세요! 다시 여기 오기 전까지 마음껏 행복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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