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 전이나, 2천년 후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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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이나, 2천년 후에나
  • 노경실 작가
  • 승인 2020.01.15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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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94

누가복음3:9~14>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마을버스는 나에게 자가용처럼 편리하다. 뿐만 아니라 마을버스라는 특별한 정체성(?)으로 서울 시내를 통과하는 버스와는 다른 소소한 재미와 일상의 이야기를 자주 만나고, 보고 들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신참 기사의 오리엔테이션 같은 장면이다. 신참 기사가 운전대를 잡고, 앞 쪽 출입문의 제일 앞자리에 선배 기사가 앉아서 지도를 한다. 몇 년 째 이 모습을 보는데 한 가지 공통점은 선배 기사가 마음 좋게 생겼어도 신경질 적으로 보여도, 전라도 사람이어도, 경상도 사람이어도, 교회 신자처럼 보여도, 술꾼처럼 보여도 그들은 신참 기사에게 한결 같이 반말, 사장님 말투 그리고 절대 칭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미리 방송을 틀어야지! 어휴, 무식한 놈! / 눈 똑바로 떠! 바로 좌회전 차선으로 들어가야지! 군대서 운전은 깝으로 했냐?/ 다음 정류장부터는 노인네들이 많이 탈거야. 그러니까’

여기 소개하는 말은 아주 순화시켜서 하는 말이다. 물론 안전과 생명이 걸린 ‘운전’ 이니 당연히 날카로운 지적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늘 마음이 불편하다. ‘자기 아들이라면 저렇게 함부로 말하고, 윽박지르면서 훈련을 시킬까? 친구 아들이라면, 자기 동생이라면 저렇게 무시하고, 비야냥거리고, 인격적으로 모멸감이 느낄 정도로 할까?’ 선배 기사의 거드름, 오만함을 보다 못한 나는 몇 번이나 일어나서 ‘그만하세요!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됩니까? 어쩌구 저쩌구!’ 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이다. 

말 그대로 그것 쫌...................... 안다고 완전 무시를 하는 거다.

그런데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현장이 있다. 그것은 서울역 같은 정말 ‘생짜배기 길바닥 노숙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나, 자활을 위해 저마다 일을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노숙인 쉼터’ 같은 곳이다. 그 곳이 어디이든 일단 ‘노숙인’이라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인생의 가장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처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마을버스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저거 바보 아니야? 왜 저렇게 하지?/ 킥킥, 저것 좀 봐. 정말 한심하게 생겼다./ 웃기네! 왜 저걸 저기에 담는 거야? 무식한 XX네!’

누군가 자기 생각이나 자기의 스타일, 습관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말하거나 행동하면 가차없이 흉을 보고, 비웃는다. 그래서 여기서도 왕따가 벌어진다. 

말 그대로 그것 쫌...................... 내 생각과 다르다고 완전 무시를 하는 거다.

이런 경우도 종종 본다. 강연을 위해 한 마을에 갔을 때, 마을회관 앞 평상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이 주전부리를 하며 누군가를 향해 비웃는 모습을 봤다. 그들과 또래로 보이는 할머니가 지나가자 -그 할머니는 몹시 살이 쪘는데, 한 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돼지같다, 촌스럽다, 무식하다, 지저분하다 ,,,’ 며 한없이 흉을 보았다.  

말 그대로 자기는 쫌....................잘났다고 완전 무시를 하는 거다.

이글을 읽는 분들 중 ‘아니, 왜 잘난 사람들 비판은 안 하는 거야?’라고 화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잘난 사람들이 사람 무시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야기는 새로울 게 없어서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왜 같은 힘든 사람들끼리 안아주고, 보듬어주지 않는 것인가?’ 이다. 내가 아주 어릴 때 버스안내양들이 장애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버스를 타면 못 타게 하거나 대놓고 무시하던 일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때도 나는 지금처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과학문명이 미친 듯이 빨라지고, 교회들은 궁궐보다 더 화려해지는데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비웃고, 못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손가락질한다.

광야의 세례 요한의 질타가 인공지능과 스마트폰의 세상에서도 필요하다니! 세례 요한 앞에 선 무리들과 세리와 군인들도 그랬다. 자신들도 동포들처럼 로마의 압제와 율법의 목조임 속에서 하루하루 버둥거리며 살면서도 지금의 우리들처럼 ‘조금이라도 어리버리해 보이고, 나보다 가난하고, 나보다 덜 배우고, 심지어 외모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되면 함부로 대했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난 지금 교회 안에서도 버젓이 다른 의미의 강탈과 거짓 고발이 일어나고 있으니, 인간의 심령이 변화되려면 5천 년, 5만 년은 더 지나야 하는가? 시간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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