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꿈터 만든 신앙인…“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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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꿈터 만든 신앙인…“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9.11.19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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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대통령, 규암 김약연 목사
김약연 목사.
김약연 목사.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근거지가 되어 주었던 북간도 명동촌의 규암 김약연 목사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시인 윤동주의 외삼촌이자 스승이라고 말하면 더 이해가 빠를 것도 같다. 흔히들 김약연을 언급할 때면 ‘간도의 대통령’이라고 별칭한다. 

‘명동촌’, 독립을 꿈꾸는 자들의 터
1868년 9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김약연은 어린 시절부터 남종구 등 유학자들에게서 사사하고 유교 경전에 능통할 정도로 촉망받는 재원이었다. 구한말 이미 국운이 기울어버린 조선을 보며 북방의 주민들은 주인 없는 땅, 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32세 나이에 김약연은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가문 등을 포함해 142명을 이끌고 북간도 화룡현 장재촌으로 이주했다. 그 땅에 동쪽을 밝힌다는 뜻의 ‘명동촌’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김약연은 수백 정보의 땅을 사들이고 조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일구었다. 땅 중 일부를 가장 먼저 학전(學田) 명목으로 남겨두었고, 1901년 자신의 호를 딴 ‘규암재’라는 서당을 세워 한학과 함께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가까운 용정에서 이상설이 1906년 ‘서전서숙’을 설립했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 때문에 학교 문을 닫게 되자 교사와 학생들을 수용해 ‘명동서숙’을 설립했다. ‘명동서숙’은 훗날 수많은 우국지사를 길러낸 ‘명동학교’가 된다. 

윤동주, 나운규, 문익환 등이 명동학교 출신들이다. 1925년 폐교되기까지 명동학교는 1,200여명 졸업생을 배출했고, 그 중 상당수는 독립운동가가 됐다. 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명동촌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은 가톨릭 사제가 협조를 거부하자 김약연에게 의탁했고 명동촌 뒷산에서 권총 사격연습을 하기도 했다. 명동촌은 조선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의 꿈터와 같은 공간이었다.  

김약연 목사가 설립한 명동학교는 우국지사를 길러내는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김약연 목사가 설립한 명동학교는 우국지사를 길러내는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유교’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변화
유교적 가치관을 가치고 있었던 김약연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도 명동학교를 운영하면서였다. 상동교회 청년회 출신으로 전덕기, 남궁억, 주시경, 이준, 이동녕 등의 영향을 받았던 정재면이 22세 나이에 명동학교 교사로 부임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정재면 선생은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부임조건을 내걸었고 김약연은 이를 수용하며 신앙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명동중학교(1910)와 명동여학교(1901)를 잇따라 설립하면서 민족 교육과 신앙교육을 실시했다. 

김약연과 명동촌 사람들은 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기독교를 유교 대신 수용한 것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근대교육과 민족 지도자 육성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약연과 명동촌 지도자들은 1909년 명동교회를 설립했다. 김약연은 1915년 장로로 피택됐다. 설립 초기 2백여명이 출석하던 교인들은 2017년에는 700여명이 출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믿음은 고난 중에서 그들을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간도만세운동’에 그들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명동촌은 북간도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더욱 부각되어갔다. 1913년에는 북간도 최의 한인자치기구 ‘간민회’가 만들어졌고, 김약연은 초대회장을 맡게 된다. 한때 조선인 자치정부를 만들려는 시도까지 있었지만 실패했다. 

1919년 한반도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흐름을 이어간 곳이 바로 명동촌이었다. 김약연이 수장으로 있던 간민회는 1919년 3월 13일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3월 13일 당일 수천명의 군중과 학생들이 명동학교 마당에 집결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인근 용정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무려 3만명이 함께 만세를 부르는 역사가 만들어졌다. 당황한 일제는 만주군을 사주해 무력진압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순국하고 말았다. 

김약연이 간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된 것은 1920년 52세 나이였다. 그는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년 동안 옥고를 치렀고, 그 와중에 일본군은 1920년 10월 명동학교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명동학교는 문을 닫게 됐지만 명동학교 출신들은 교육과 무력투쟁 등 다방면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명동학교의 영향을 받은 간도의 학교들은 여전히 독립을 위한 인재를 배출했다. 

김약연은 중국 당국과 간도 자치권을 두고 다각도로 협상을 벌였고, 중국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김약연을 ‘간도의 대통령’이라고 부르게 됐다.  

목사가 된 독립운동가 김약연
김약연은 1929년 당시 예순의 나이에 목사안수를 받는다.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연구과정 수업만 듣고 일 년 만에 졸업하는 파격이었다고 전해진다. 1930년 그는 명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고, 명동학교의 맥을 잇는 은진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다. 1938년 은진학교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여전히 간도의 신앙과 교육으로 민족운동을 펼쳤던 김약연 목사. 그는 1942년 10월 24일 7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약연 목사가 가족과 제자들을 향해 남긴 마지막 유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유언을 묻는 아들의 질문에,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고 답했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명동학교 터는 밭으로 변해 있고, 명동교회는 역사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약연 목사를 추모하는 공덕비만 남아 있다. 제자 윤동주의 생가가 복원될 정도로 관심이 높은 것을 생각하면 김약연 목사의 발자취를 다시 살리는 노력이 요청된다. 재조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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