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과 의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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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과 의의(2)
  • 승인 2004.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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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부흥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발흥

과연 1907년 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산물이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와 같은 주장이 1907년 부흥운동의 성격을 깊이 연구하면 논리적인 비약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주변국의 침략과 민족적 위기가 한국인들의 심성을 가난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적인 소망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하면서 부흥운동이 촉발된 것은 아니다.

비정치화 해석은 다음 몇가지 면에서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정치적인 소망이 끊긴 상황에서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대치시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됐다는 주장은 부흥운동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 곧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 특히 1903년과 1907년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살펴보면 회개운동으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회개운동이 강하게 나타났다. 회개운동은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이 개신교의 신앙이다. 따라서 민경배, 이만열, 유동식, 이덕주교수를 비롯하여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의 부흥운동의 해석은 부흥운동이 1차적으로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평가절하한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순수 종교적인 운동, 신앙적인 운동, 곧 죄에 대한 회개, 성결한 삶, 복음전도를 특징으로 한 말씀과 성령의 역사였다. 당시 자료를 분석하면 한국인들이라면 민족적 위기 앞에 민족의 시련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민족의 위기가 영적인 축복의 수단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위기 앞에 그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고민한 것도 사실이지만, 부흥운동이 종교적인 방향으로 틀었기 때문에 발흥한 것은 아니다.

둘째, 비정치화 해석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독자적으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당시 일고 있던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맥락 속에서 발흥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은 당시 영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일고 있던 ‘웨일즈부흥운동’, ‘인도부흥운동’, ‘아프리카부흥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그해 영국의 동아프리카 Toro의 수도, Kabarole에서도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미 웨일즈, 인도, 한국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이어 아프리카 부흥운동의 소식을 접한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어떤 인종 혹은 지역에 제한되지 않고 인도, 중국, 한국, 아프리카, 웨일즈, 미국에 있는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을 알려는 이들 모두에게 나타난다는 표식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가운데는 이미 무디부흥운동, 케직운동, 나이아가라사경회운동 등 19세기 말의 부흥운동을 경험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부흥운동은 해외선교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어 부흥운동의 결과 태동된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으로 한국에 파송된 이들이 상당수였다. 1907년 1월 14일 부흥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 모두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었다.

셋째,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말씀과 기도로 특징되는 사경회운동이나 기도회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해석이다. 원산부흥운동, 평양대흥운동 모두 기도회나 사경회 동안에 일어났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양일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 사경회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한국에 임했던 것이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숭실대학과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비롯 미션스쿨들로, 평양 남산현감리교회를 비롯하여 교파를 초월 평양 전역으로, 다시 이북지역은 물론 서울과 경기를 비롯하여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던 것이다.

민족의 위기 앞에 한국교회가 정치적으로 흐를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비정치화를 추구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면 왜 일제의 압박 속에 있던 한반도의 다른 주변국에서는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전 세계적으로 웨슬리부흥운동, 미국의 1차 2차 대각성운동, 무디부흥운동,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운동, 그리고 한국의 원산과 평양대부흥운동 모두 성령의 역사로 인한 영적각성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인 소망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전환시키고, 교회를 비정치화시킴으로써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비정치화 해석은 춘생문사건 이후 교회 안에 일기 시작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교회 지도자들 간의 대립을 풀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와 깊이 맞물려 있고, 그 사경회는 1890년 채택된 네비우스선교정책에서 기원됐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박용규교수 /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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