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가 된 ‘교회 청소부’의 드라마같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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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가 된 ‘교회 청소부’의 드라마같은 인생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9.11.05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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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기획 -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㉜목사 이필주
이필주 목사
이필주 목사

이필주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인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 전체로 보면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만큼이나 신앙인으로서 드라마틱한 간증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방탕한 길바닥 싸움꾼에서 탁월한 군인으로 거친 삶을 살던 그가 ‘복음’을 만나며 전도자로 변화되는 과정은 성경 속 바울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군인이자 교사, 목사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이필주 선생의 삶을 더듬어봤다. 



방탕하고 거친 청년기

1869년 서울(추정)에서 퇴락한 양반가문의 후예로 태어난 이필주는 18세때 부친이 사망하고 자신도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 뒤 삶을 비관하며 타락하여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청년시절을 회고하면서 “주색잡기에 침혹하여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다”거나 “점점 버린 사람이 됐다”, “노래하고 춤추기와 탁견(택견)하고 편싸움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살림에는 힘을 쓰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그런 그가 정신을 차린 계기는 군에 입대하면서다. 몸 쓰는 일에 적성이 맞았던 그는 친구의 권유로 1890년 구한국 군대에 사병으로 입대하고 그야말로 승승장구 한다. 시험 때마다 승급을 거듭했고 동학농민전쟁 진압에도 투입되어 승진을 할 정도로 공(?)을 세운다. 그러나 34살이 되던 해 두 아이를 전염병으로 한꺼번에 잃으면서 인생의 깊은 허무를 체험한다. 극심한 절망감에 빠진 그를 위로한 건 ‘복음’이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다

주색잡기로 젊음을 소일하던 그가 자신의 모든 삶을 청산하며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의 신앙심이 깊었던 건 아니었다. 부하들을 거느리고 취미삼아 상동교회를 출석했는데 1년여가 지날 무렵 꿈을 통해 강력한 영적 체험을 한 뒤 기독교로 본격 회심하게 된다.
1903년 4월 부활주일에 스크랜튼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군대를 그만 두고 신앙에 ‘올인’하기 시작한다. 변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됐다. 집안 구석구석에 있는 부적과 신주단지 등을 찾아내서 한 데 모아 불을 지르고는 “예수를 믿어야 모두가 산다”고 위협 아닌 위협을 했다. 그 일로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교회에 출석했다고 전해진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끝없이 교회 출석을 강요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게 됐다. 유명한 싸움꾼에 군인 출신인 그가 했던 전도(?)는 무척 효과가 좋았다.

신식군사훈련까지 받았던 그였지만 군을 떠나자 할 일이 없었다. 잡일을 전전하다가 상동교회 청소부로 일하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받는다. 이 일로 그는 기독교로 더욱 깊게 귀의하게 된다. 이필주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전덕기’와 교회에서 깊은 교분을 쌓게 된다. 그보다 앞서 예수를 믿었던 전덕기는 이필주보다 6살이나 어렸지만 이필주는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에게서 성경을 열심히 배웠고 사경회도 빠지지 않았다. 전덕기 목사는 신앙생활에 충실한 이필주를 교회가 운영하는 초등교육기관 공옥소학교 체육교사로 추천한다. 이후 설립된 중등교육기관 상동학원에서도 그는 교편을 잡는다. 이곳에서 그는 남궁억, 최남선 등 걸출한 동료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만리현교회는 이필주 목사의 생애를 담은 스토리보드를 설치했다.
만리현교회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필주 목사의 생애를 담은 스토리보드를 설치했다.

 

사회 변화에 앞장서다

1910년 을사늑약으로 조국을 잃자 그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이듬해 협성신학교(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수료한다. 전도사가 된 그는 1913년 왕십리교회에 부임했고 1915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는다. 이 무렵 전덕기 목사가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전덕기가 떠난 빈자리를 이필주가 채운다. 감리교의 지도급 인물이 된 그는 결국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감리교 대표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게 된다. 
애초에 3.1운동은 이필주와 가까웠던 박희도를 필두로 한 기독교청년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단의 독립운동 차원에서 추진됐다. 정동교회에 부임하던 시절 이필주 목사는 박희도로부터 만세운동 준비 소식을 듣고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한다. 2월 27일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계 대표들운 이필주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지역책임자를 선정하고 민족대표 16인을 확정했다. 

3.1거사 추진과정에서 천도교의 참여는 확산의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교섭 초기 기독교 측 일부 인사들이 교리를 문제로 불가 입장을 폈기 때문이다. 이 목사가 시무하던 정동감리교회에서도 여러 차례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 끝에 종교와 교파를 넘어 민족적 차원에서 연대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어 연대가 성사됐다. 
한편 그는 3.1운동 직후 들이닥친 일제 관헌에 의해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된다. 이후 1920년 10월 재판을 통해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이듬해 11월 출소한다. 출소 뒤에는 목회자로서의 활동에 전념한다. 부흥사로서 활발하게 여러 교회를 누볐고 1934년 65세의 나이로 정년은퇴를 한다. 그러나 당시 목회자가 없던 수원 지방의 남양교회의 요청으로 9년간 목회를 더 하고 1942년 4월 21일 노령과 건강악화로 별세한다. 당시 그의 나이 74세였다. 그는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정부는 1962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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