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무엇부터 만드셨을까?
상태바
하나님은 무엇부터 만드셨을까?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9.10.24 16: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90

창세기3:2~3>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장래 희망은?  ‘꿈은?’ ‘갖고 싶은 직업은?’ 
아이들이 유치원 때부터 지겨워할 정도로 듣는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대답하는 모습은 지역이나 남녀를 뛰어넘어서 거의 비슷하다 
유치원 아이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냉큼 대답한다. 공주, 로봇, 발레리나, 공룡, 엄마나 아빠 그리고 호랑이나 소방차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도 많다. 

초등학생이 되면 조금 더 구체적이다. 자신의 실력(?)이나 적성 같은 것은 별로 개의치 않은 채 말 그대로 ‘꿈’을 얘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예인, 선생님, 축구선수, 과학자(남자 아이들에게 압도적으로 많다), 바리스타, 수의사, 경찰(요즘 들어 늘어나고 있다) 등등.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면 반 이상은 질문한 사람의 의중을 다 안다는 듯 일부러 삐뚤어진 심보로 답하기도 한다.  ‘백수요!’ ‘건물주요!’ ‘그냥 숨만 쉴래요!’ ‘돈 많은 여자(남자)랑 살래요!’ 그리고 유투버(원하는 아이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요!‘

하지만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되어서는 질문 자체가 변하게 된다. 우선 ‘장래희망’이라는 질문은 결코 하지 않는다. ‘꿈’은 아예 입 밖에도 꺼내지 않는다. ‘갖고 싶은 직업’이란 말도 하기 힘들다. 우선 ’대학이야, 취직이야?‘로 시작해서 대학이라면 전공 정도 묻는 게 고작이다. 취직이라고 답하면 ’어느 분야‘ 정도 질문한다. 아니 이것도 묻기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이제는 아예 아무 것도 묻지 않아야 교양인이고, 눈치 있는 어른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아이들이 그저 건강한 생각과 몸으로 커 가는 것으로 안도의 숨을 쉬며 하루하루 보내는 부모들이 많다. 지난달에 군부대에 가서 강연할 때에도 그들은 ‘꿈 없어요!’라며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가 만약 전쟁이라도 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라는 걱정이 들 만큼 젊은이들이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대충 살다가 갈래요’ 라고 체념하거나, 살다보면 한 건 정도는 생기겠지 하는 요행을 바라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군복을 입었는데도….

하지만 십대이든, 대학생이든, 군인이든! 이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눈이 한 곳을 향해 반짝거리며 심지어는 눈이 벌개질만큼 집중하는 한 곳이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을 이처럼 경배하는 방법 중 하나가 ‘듣기’ 보다는 ‘보다’이다. 

유투브 역시 듣는 기능만 있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권력(그것이 정치권력이든 육체의 권력이든)의 공통점은 인간의 수많은 행위들 중에서 “계속 보게 하는 것”에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같은 커피집이라해도 우선은 보기 좋게 인테리어 된 커피집이 더 인기가 많다. 
사람도 커피집처럼 어떻게 치장했는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요즘 내가 제일 애가 타다 못해 화가 나는 장면은 이른 아침 지하철 안이다. 그 이른 시간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보다가 졸다가, 보다가 졸다가. 도대체 무얼 볼까, 게임, 쇼핑, 드라마, 운동 경기, 유투브 안의 시사토크 코너 등등. 텍스트를 통한 ‘일기’의 행위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른다. ‘책도 보는 거 아닌가요?’ 책은 엄연히 읽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말씀을 보는 게 아니라 읽는 것처럼.

생각해본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얼굴(머리) 중에서 제일 먼저 눈을 만드셨을까? 그래서 두 눈이 온통 다 보고는 그 다음에 생각하고, 말하고 하는 법을 알게 되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를 ‘보느라’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

성경을 ‘보느라’ 말씀을 ‘읽지’ 못하고 이리저리 예배드리러 찾아다니는 것일까? 그래도 예전에는 기도원이나 다른 교회라도 찾아다녔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안에서 유투브를 통해 보고 듣느라 바쁘다. 

이 지점에서 또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하나님은 눈을 제일 나중에 만드셨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서 보고싶은’ 욕망의 DNA가 지금 우리의 두 눈 속에서 날마다 ‘어서 보려는’ 욕망을  뿜어내는지도!  여하튼 ‘세상 보느라’ ‘하나님 마음 읽기’ ‘내 이웃들의 아픔이나 슬픔을 읽기’는 거의 하지 못하는 기이한 문맹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