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와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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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와 사회적 책임
  • 박용규 교수(총신대신학대학원 역사신학)
  • 승인 2019.10.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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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업을 중요시한 초기선교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사역 못지않게 처음부터 교육사역을 충실하게 실천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 베어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선교를 착수하면서 바로 학교를 설립했다. 경신학당,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당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서양교육은 한국정부의 요청이기도 했다. 보빙사 일행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사절단들은 미국의 공립학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가 고종황제에게 미국의 교육제도를 보고했다. 고종황제는 1884년 한국에 입국한 호러스 알렌에게 영향을 받아 서울에서 외교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포크 해군 중위를 통해 미국 정부에 교사로 일할 사람 세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국무장관은 그 요청서를 받고 당시 미국교육위원회 위원장인 존 이튼 장군에게 위임하였고,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당시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 재학 중인 청년 헐버트, 길모어, 번커를 선발하여 한국에 파송했다. 미국정부가 신학생들 가운데 교사를 선발한 것은 선교적 차원을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1863년 7월 4일 한국에 입국했다. 육영공원은 양반출신 학생들을 모아 1886년 3월 29일 개교했다. 이후 국내에는 수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서양교육은 백성들의 의식을 깨우고 새로운 세계관을 심어주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한반도 전역에서 불타올랐던 대부흥을 통해 학교 설립운동은 정점에 달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을 통과하면서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더욱 강하게 일어 교회마다 학교를 설립하는 운동이 일어나 하루아침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숭실학교가 대변하듯 장로교선교회는 효과적인 학교운영을 위해서는 감리교선교회와의 협력도 아끼지 않았다. 병원설립과 운영 못지않게 학교 설립과 운영은 한국에서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중요한 선교사역이었다. 교육이 반드시 기독교적 노선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분명히 했다.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 때 북장로교선교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우리는 선교 교육사업의 목적과 범위 결정을 도와주는 지도원리로 ‘사람들을 위한 복음과 기독교인들을 위한 교육’이라는 원리를 믿는다. 선교 교육사업은 교회를 위한 기독교교육이어야지 대중을 위한 세속교육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한국 내 선교부의 입장은 미국 해외선교부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선교부는 학교 설립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더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1915년 설립된 연희전문학교도 미국 선교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미국북장로교해외선교부는 복음전도와 병원설립, 학교설립과 운영이 병행돼야 한다는 사실, 이 둘은 선택사양이 아니라 복음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미션스쿨들에 믿지 않는 학생들이 입학하여 기독교 가치를 손상시키는 위험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션스쿨은 학교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존중하는 교육을 시킴으로 그런 교육을 받고 배출된 학생들을 통해 사회에 선한 기독교 영향력을 확산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처음부터 미션스쿨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을 중시했지만 비 기독교인에게도 교육의 문호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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