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에 묻힌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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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에 묻힌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9.10.22 0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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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㉚한국을 사랑한 헐버트 선교사

고종의 헤이그 특사귀국 후에도 독립 정당성 알려

선교사로 동대문교회 담임목사 지내며 복음 전파 기여

한글은 가장 완벽한 문자극찬세계에 우수성 알려

 

헐버트 선교사.
헐버트 선교사.

최근 한 일본 의류회사가 광고 문구에 ‘80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메시지를 담으면서 과거사 논란을 일으켰다. 위안부 할머니를 모독한 것이 아니냐는 빈축을 사면서 해당 회사는 결국 광고 중단을 결정했다.

미래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준엄한 시대정신이다. 본지는 올 초부터 연중기획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선배 신앙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이번에 만나볼 인물은 뤼순(旅順)감옥에 갇혀있던 안중근 의사가 일본 경찰의 질문에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자신의 바람대로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파란 눈의 한국인 헐버트는 선교사이자 교육가, 독립운동가로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어느 때보다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날을 맞아 ‘한글의 큰 스승’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에서는 ‘헐버트 선교사’와 관련된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8일까지 진행된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날을 맞아 ‘한글의 큰 스승’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에서는 ‘헐버트 선교사’와 관련된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8일까지 진행된다.

 

선교사 헐버트

헐버트는 1863126일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회중교회 목사였지만 동시에 대학총장을 지냈고 어머니 역시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다트머스 대학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청교도의 후예였던 아버지와, 인도 선교사의 딸인 어머니 슬하에서 청렴성과 정의, 사랑, 겸손이라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배웠다.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을 다니던 도중 헐버트는 조선에서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을 설립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23살이던 그는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기 위해 바다 건너 조선으로 향한다. 188674일 조선의 제물포에 첫 발을 내딛은 뒤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육영공원의 교사로 한국에 온 지 3년만인 1889년 세계 지리, 천체, 풍습, 산업, 교육 및 군사력 등을 망라한 최초의 한글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발간했다. 그는 서툰 조선어에도 불구하고 한글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한글로 책을 펴냈다. 그는 사민필지를 통해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쓰고 배우기 편한 문자인 한글을 널리 보급하고 조선인들에게 국제 교류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고자 했다.

5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한 후 학교가 문을 닫자 미국으로 돌아갔던 헐버트는 18939월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다. 다시 방한한 그는 배재학당 안의 삼문출판사를 중심으로 주로 문서선교에 관여하며 다양한 주제로 한국에 관한 글들을 발표한다. 그는 4년간 이곳을 맡아 운영했는데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출판계의 근대화를 앞당겼다.

1893년에는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지냈으며, 1906년 노량진교회 설립 예배를 인도하면서 노량진 상수원 근처에 살던 무당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기도 했다. 그는 1887년 언더우드와 함께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세례를 행하는 등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개신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03년에는 한국 YMCA의 창설을 주도하면서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헐버트 선교사가 쓴 ‘한국의 역사’
헐버트 선교사가 쓴 ‘한국의 역사’

 

헐버트의 한국사랑

헐버트(1863-1949)는 누구보다 한국의 문화를 아끼고 사랑했다. 특히 한글사랑이 지극했다. 그는 한글에 대해 말소리가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이기 때문에 발음 기호가 필요 없어 우수한 문자라고 극찬했다. 그는 여러 매체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또한 입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을 최초로 오선지 악보로 옮겨 소개하고 한국의 전래동화를 영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 중 하나다. 먼저 한민족은 보통 사람도 1주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했다. 한글은 각 글자마다 하나의 소리만 있는 우수한 글자다” 194972헐버트의 고별 증언

조선에는 모든 소리를 자신들이 창제한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자가 존재한다. 글자 구조상 한글에 필적할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19492뉴욕트리뷴

 

독립운동가 헐버트

그를 잊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업적은 역시 독립운동이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자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박해받는 한국인들을 돕는 것이 참 선교라며 대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20137월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189647일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서재필을 크게 도왔다. 헐버트는 서재필의 신문 창간 제의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는데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4개월 만에 독립신문을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헐버트의 삼문출판사의 역할이 컸다.

헐버트는 독립신문편집에도 도움을 주었으며 이 신문의 영문판은 헐버트가 편집인이나 다름없었다. 헐버트는 이외에도 1892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월간지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의 공동 편집인이었고, 항일투쟁의 선봉자였던 영문월간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1901년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독립운동가로서 가장 두드러진 면모를 보인 것은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된 것이다. 일본이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강제로 빼앗기 바로 전, 고종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외교적인 도움을 호소하기 위해서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했다.

이때 미국과 일본은 이른바 가츠라태프트밀약을 맺고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권 보장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망을 서로 묵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있던 고종은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 즉 쌍방 중 어느 한 나라가 제3국에 의해서 침략을 당할 경우 다른 한 나라는 이에 간섭해서 우호적으로 사태를 해결해 줘야 한다는 거중조정 내용을 문구 그대로 믿고 밀사를 파견했던 것이다.

결국 헐버트는 친일인사들로 구성된 미국 정부에 고종의 밀서를 접수시키지도 못했고, 한국과의 신의를 저버린 자신의 조국을 원망하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헐버트는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한국정부에 알리고 그것을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적인 통로로 활용하기를 권고했다.

이에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 세 사람의 밀사를 파견했다. 헐버트 자신도 헤이그로 가서 유럽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하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이 일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098월에 헐버트는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때 강제로 퇴위된 고종으로부터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해 둔 25만 달러 상당의 비자금을 찾아 안전한 은행으로 옮겨 달라는 밀명을 받는다. 하지만 해외독립운동을 돕기 위해서 비밀리에 마련해 둔 이 자금도 일본 통감부의 간계로 결국 다 빼앗기고 말았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날을 맞아 ‘한글의 큰 스승’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에서는 ‘헐버트 선교사’와 관련된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8일까지 진행된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날을 맞아 ‘한글의 큰 스승’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에서는 ‘헐버트 선교사’와 관련된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8일까지 진행된다.

양화진에 묻히다

헤이그 특사 파견과 관련해 일제의 핍박이 거세지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헐버트는 미국에서도 순회강연과 신문기고를 통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루즈벨트의 정책을 비판하며 한국을 잊지 않고 돕는 일을 했다.

광복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 박사가 기념식 단상에 있어야 한다며 초청했으나 부인의 병세가 위중해 응할 수 없었다. 그해 겨울 부인이 숨진 뒤 1949년 다시 초대받자 노구를 이끌고 729일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배로 한 달가량 걸리는 여독을 이기지 못한 채 8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40년 만의 방한 길은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됐고,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미국 AP통신과의 출국 직전 인터뷰는 유언이 됐다. 811일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회장이 치러졌으며, 18976살의 나이로 숨져 양화진에 먼저 묻혀 있던 아들 곁에 안장됐다. 정부는 이듬해 31일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 박사는 젊은 나이에 이 땅에 와 조선 청년들에게 근대사상을 고취시키고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며 자신의 모국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정의와 인간애라는 인류 공존을 위한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 올바른 애국을 주장했다고 평가했다. 김 회장은 또 오늘날 경제,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애국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면서 헐버트 박사가 주창한 올바른 애국심이 국민들 가슴속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 사회가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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