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 문화 운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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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한 죽음 문화 운동이 필요하다
  • 남서호 목사
  • 승인 2019.10.0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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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호 목사/양재동산교회, 생명사랑목회포럼 회장

인생의 경주에는 아주 단순한 규칙이 있다. 각 단계의 장애물이 하나씩 나타나면 그 즉시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뛰어넘지 못한 장애물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 인생의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인생의 행로에서 마지막 장애물을 발견하고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닥쳐오는 죽음을 어떠한 각오로 맞을 것인가는 노인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다. 놀랍게도 많은 노인들은 죽음이라는 이 준엄한 사실에 대해 너무 어른답지 못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70세의 어느 노인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죽음이라는 말만 나와도 얼른 그 자리를 피해버리곤 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단순하고 좁은 내세관을 가지고 있어서, 천국이란 ‘영원한 안식의 나라’ 혹은, ‘하나님을 직관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두가지 사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하다 할지라도, 천국이라는 것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입장이며, 영생의 올바른 의미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 임종을 맞이하는 믿는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평온함과 웃음은 이러한 새 세계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는 데 보람을 찾듯이 죽는데도 보람을 찾는다면 바로 그런 죽음이 아닌가 싶어진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을 때 당하는 육체적 고통보다 그 정신적 고통 때문일 것이다. 정신적인 고통이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누적되는 퇴적 고통이다. 직접, 동료, 재산, 지위, 명예, 식욕, 성욕, 기대, 미래, 희망들이 마치 빗의 이빨 빠져나가듯 하나씩 빠져나가 남는 거라곤 고독과 소외감뿐인데, 바로 그것이 죽음을 공포에 몰아넣는 원흉들이다.

사람은 모두가 예비노인이다 그리고 현대는 그 예비노인들에게 삶의 보람 못지않게 죽음의 보람을 요구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송나라 때 학자 주신중이 인생오계라 하여 생계, 신계, 노계, 사계를 가르쳤는데, 곧 사계란 보람 있게 편안하게 그리고 궁상맞지 않게 죽을 수 있는 노후의 계획인 것이다. 그는 이미 나이 40이 되면 늙어서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을 마련해 둠으로써 죽음에 즈음하여 만족하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현대판 사계랄 수 있는 죽음학은 구미 각국에서 첨단 학문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그 수요가 급증하는 실용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죽음에서 공포를 증발시킨 사생관으로 남은 하루하루를 편안히 사는 지혜를 가르치는 죽음학 강의가 우리나라에서도 연중 계속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뒤늦은 대로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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