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개혁’ 부르짖은 신문의 외침,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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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개혁’ 부르짖은 신문의 외침,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09.1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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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연합신문으로 들여다 본 30년 전 한국교회

기독교연합신문이 지령 1500호에 이르렀다. 햇수로 따지면 31, 강산이 변해도 세 번은 변했을 시간이다. 그 사이 한국교회도 세월의 세찬 강물 속에 적잖은 변화와 발전, 그리고 갈등을 겪었다. 기독교연합신문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1980년대 후반, 30년 전의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들여다봤다.

 

1988년 8월 28일자 제28호 신문에 실린 예장 통합 장로 총회장 후보 출마 기사.
1988년 8월 28일자 제28호 신문에 실린 예장 통합 장로 총회장 후보 출마 기사.

장로가 총회장 후보로?

독서의 계절 가을이라지만 한국교회에겐 총회의 계절이다. 이미 거사를 치르고 한숨 돌린 교단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장로교단과 침례교단은 올해도 정기총회 개최 준비에 여념이 없다. 9월이면 정기총회로 시끌벅적한 한국교회의 풍경은 30년 전에도 그대로였다.

말도 많고 볼거리도 많은 정기총회 안에서도 백미는 단연 선거라 하겠다. 1년간 교단을 이끌 리더십을 뽑는 자리엔 언제나 교계와 사회의 이목이 쏠린다. 지금이야 교단을 대표하는 총회장엔 목사가 세워지고 장로는 부총회장을 맡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30년 전엔 장로가 총회장 후보에 출마하는 이색적인 일도 있었다.

1988828일자 제28호 신문에 실린 목사·장로 표 대결 뜨겁다란 제목의 기사다. 88년 예장 통합 제73회 정기총회에는 당시 부총회장 임옥 목사 외에 한 명의 인물이 더 총회장 후보로 등록했다. 기전여자전문대학장, 전주기독학원이사장을 역임했던 조세환 장로가 그 주인공이었다.

직전 부총회장이 자연스레 총회장직을 승계하는 것이 관례인 장로교단 총회에서 장로 총회장 후보라니. 83년도에 이어 두 번째라고는 하나 총대들의 표심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세환 장로는 목사와 장로 간에 온갖 불협화음을 씻고 사랑과 존경심 위에 하나 되도록 힘쓰겠다고 출마의 변을 밝혔다.

조 장로의 출마를 놓고 두 진영은 팽팽히 맞섰다. 장로총회장 불가를 외친 측에서는 장로교 헌법상 축도권과 치리권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만이 총회장이 될 수 있고 목사와 장로 직책은 엄연히 구분된다고 주장한 반면, 반대 측에서는 직책보다는 개인의 인품이 중요하다. 한국교회의 주축인 평신도 중에서 총회장이 나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이변은 없었다. 통합 73회 정기총회에서는 임옥 목사가 약 61%의 득표로 차기 총회장에 당선됐다.

 

연합기관 난립을 비판했던 1989년 4월 16일자 제58호 신문 기사.
연합기관 난립을 비판했던 1989년 4월 16일자 제58호 신문 기사.

연합기관, 언제쯤 연합할까

많아도 너무 많다. 한국교회 연합기관 이야기다. 한교총, 한교연, 한기총, 교회협 등 이름도 헷갈리는 연합단체들은 다들 자신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손을 번쩍 든다. 평신도들은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조차 하기 힘든 이들이 대다수다. 그런데 연합기관의 난립 문제는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 출범하기도 전인 30년 전에도 한국교회의 골칫덩어리였다.

1989416일자 제58호 신문은 말로만 연합분열장본인이라는 제목으로 교계의 연합단체 난립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당시 한국기독교연합회 발기 모임이 열렸지만 교계에는 이미 전통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대한기독교연합회에서 탈바꿈한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가 있었다. 이뿐 아니라 한국개신교교단협의회, 한국기독교교역자협의회, 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 한국예수교협의회 등 수많은 연합단체들도 각자 명함을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오늘날도 연합단체는 여전히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한 채 전체 개신교인의 3%만 남은 한기총은 정치집단인지 헷갈릴 정도의 광폭행보를 보이고 있고 역사와 전통의 연합단체 교회협은 예전의 명성만 못하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나마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한교총은 출범 이후 자리를 잡기까지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평가다.

말로만 연합을 외칠 뿐 실상은 분열의 장본인이라는 30년 전 신문의 날카로운 비판은 오늘날 교계 연합기관도 자유롭지 못할 듯하다. “이들 단체들은 뜻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집단일 뿐, 애당초 기독교 전체가 하나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당시 신문의 분석은 여전히 가슴 아프게 들려온다.

 

30년 전에도 민감했던 한일관계와 교계의 반응을 다룬 1989년 2월 26일자 제52호 신문 기사.
30년 전에도 민감했던 한일관계와 교계의 반응을 다룬 1989년 2월 26일자 제52호 신문 기사.

민감한 한일관계, 그때도 지금도

요즘 이시국씨가 세간의 화제다. 해동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일관계 덕분이다. 서로를 향해 날이 바짝 서있는 요즘이 아니더라도 일제강점기 이후 한일갈등은 언제나 불이 꺼지지 않은 장작처럼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3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30년 전에는 침략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히로히토 일왕의 장례에 국무총리를 조문사절로 보내려 한 것이 문제가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갈등을 촉발시킨 것은 동일하게 과거사 문제였지만 교계의 반응에는 다소 온도 차이가 있었다.

1989226일자 제52호 신문 1면은 일본의 역사왜곡과 정부의 조치를 비판하는 교계 단체들의 성명서로 가득 메워졌다. 한국개신교교단협의회는 히로히토 일왕은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무참히 핍박하고 복음을 차단한 일제의 정책 책임자인 만큼 분명하게 사과해야 한다일봄의 참회가 없는 현재 상황에서 국무총리를 조문단으로 보내는 것을 취소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 역시 조문사절단 파송에 반대하면서 한일합방 및 민족말살정책과 3.1운동 때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신사참배로 종교인들을 탄압한 히로히토를 평화운동가라 칭하는 기만행위는 그만둬야 한다고 했고, 한국복음주의협의회도 조문단 파송은 과거 신사참배 강요로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고문과 순교를 당한 사실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한일갈등을 두고 진보와 보수로 갈려 전혀 결이 다른 성명서들을 발표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배덕만 교수는 한국교회는 1960년대 한일협정 당시에도 전 교회가 힘을 모아 반대운동을 펼쳤다면서 한국정부가 주권국가로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뜻을 모아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8년 9월 11일자 제30호 신문에 실린 팝음악을 경계하라는 세미나 기사.
1988년 9월 11일자 제30호 신문에 실린 팝음악을 경계하라는 세미나 기사.

팝음악은 사탄의 음악?

아시아를 넘어 유럽, 미주지역까지 강타하며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한류 문화. 그 중심에는 방탄소년단(BTS)을 위시한 케이팝(K-POP)이 당당히 존재한다. 지금은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악인 팝음악이 30년 전 교회에서는 경계대상 1로 여겨지기도 했다.

1988911일자 제30호 신문엔 크리스챤문화연구회팝음악의 실상을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를 다룬 기사가 실렸다. 세미나에선 당시 청소년들을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팝음악이 폭력적이고 사탄숭배적이라며 강한 경계의 눈빛을 보낸다. 팝음악은 이미 주류가 됐고 힙합마저 복음전파의 도구로 쓰이는 요즘을 생각하면 시대의 간극이 여실히 느껴지는 기사다.

발제자들은 팝음악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팝음악의 일부가 사탄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잘 알려진 미국의 어떤 가수들은 지옥의 악마를 노래하는 것은 보통이고 그들의 연주 시 사용하는 배경음악과 분장에 사탄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거나 성욕구를 충동하고 마약·폭력 찬미, 신비주의와 이교사상 심지어 자살을 권장하는 가사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요즘 세대들에겐 꼰대들의 잔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발제자들의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실제로 당시 헤비메탈이나 하드록 음악엔 폭력적인 가사와 어두운 상징들이 적잖이 쓰이곤 했다. 팝음악의 위험을 걱정할 시대는 지났지만 문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버리고 문화현상을 선별하여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당시 교회음악 전문가들의 조언은 지금도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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