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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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
  • 김학중 목사
  • 승인 2019.09.1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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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 목사/꿈의교회

하루는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 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서 있을 만큼 지하철이 만석이었다. 그러던 중, 필자와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3명이 연달아 일어났다. 좀 앉아볼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 뒤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주변 사람들을 밀치며 빛의 속도로 달려온다. 그러더니 두 자리에 잽싸게 앉고, 남은 한 자리에 서둘러 자기들의 가방을 놔두었다.

‘많이 고단하셨구나’ 느끼는데, 그 때 그분들이 외친 한마디에 필자의 마음은 바뀌었다. “아이고, 권사님! 여기 자리 났어. 여기로 와!” 그 순간 싸늘한 시선들이 그 세분에게로 향한다. 물론 그분들은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웃더니 열심히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그 성경을 보면서, 필자는 낯 뜨거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처럼 세 분의 눈물겨운 우정은 자기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서로 잘되었다고 다 된 것일까? 그들의 눈물겨운 우정 때문에, 누군가는 예수님의 이름을 더 미워하게 되었고, 누군가는 교회를 더 싫어하게 되었는데 말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구호 중 하나가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이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말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전 6세기 그리스에서 살았던 노예 출신의 우화작가인 이솝이 남긴 말이었다. 이 말을 기억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27일 ‘평양탈환환영 시민대회’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더 강한 말로 바꾸면서, 지금까지 남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구호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 첫째, 모두가 동의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둘째, 모두가 동의하는 구체적인 실천사항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셋째, 그 목표와 실천사항이 올바르고 정당해야 한다. 1950년에는 “뭉쳐야 산다”는 외침이 매우 정당했다. 우선 살아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자기들을 해치려는 적군을 막아야 한다는 실천사항에도 동의하고 있었고, 일각에서 고민의 소리도 있었지만 이미 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당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곳곳에서 열심히 뭉친다. 나름대로 목표를 갖고 뭉친다. 또 뭉쳐서 나름대로 실천사항을 합의한다. 그런데 그 목표와 실천사항이 정당한지는 묻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뭉쳐야 한다’는 구호만 외친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학연, 지연, 혈연, 우정 등으로 갈라져, 이기적인 목표와 실천사항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한 우리 사회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왜 그랬는가?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이익을 취했던, 그들만의 뭉침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 때 국민들은 이 패거리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올바름에 기초해서 사회를 이끌 사람을 갈망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잘 되고 있는가? 정의에 기초하기보다, 누구 편인가에 따라서 움직이는 문화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세상을 누가 바꿔야 할까? 바로 그리스도인, 특별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다니는 우리 개신교인들이 바꿔야 한다. 개신교를 의미하는 ‘프로테스탄트’는 원래 ‘항의자, 저항자’라는 뜻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의 행동이 신앙의 기준에서 잘못되었으면 바르게 하도록 항의하고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프로테스탄트 움직임의 한 모퉁이에 기독교연합신문이 있었다. 누구도 원치 않는 소리를 기꺼이 외쳤던 기독교연합신문의 1500번째 지령을 축하한다. 바라기는 뭉치기에만 힘썼던 우리 사회를 정의로 흩어놓는 자가 되어서, 멋진 사회를 이루는 언론이 되기를 더욱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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