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 환경, 존재감 보여주지 못하는 언론은 도태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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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 환경, 존재감 보여주지 못하는 언론은 도태될 것”
  • 최명국 주필(언론학 박사)
  • 승인 2019.09.1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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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국 주필 회고록: 격동의 70-80년대를 말하다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한국 민주화에 대한 해외 관심 촉구
 70, 80년대 기독언론, 암울한 시대 속에도 교회 갱신 노력
 뉴미디어 시대, 기독언론 ‘현주소’ 점검하고 미래 구상해야


1970년대는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적 불안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72년도의 ‘7.4 남북공동성명’, 그해 12월 유신헌법 공포, 74년 1월에는 대통령 긴급조치선포로 10여 명의 성직자들이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74년 8.15 당시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학원사태 등으로 매우 혼란한 역사적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독언론도 이 엄청난 사건들의 회오리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들을 감내해야만 했다. 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선포로 인해 신문(언론) 검열을 받아야 했고, 검열관으로부터 지적받은 사항들에 대해 기사를 몇 번이고 고쳐 쓰거나 삭제하고 다시 검열을 받아 제작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신문 제작이 늦어져 배달이 지연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어서 독자들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에 바빴다. 이 시기, 언론의 기본정신인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다는 것은 극복하기 힘든 문제였다. 

국가·사회적 불안요인은 계속되어 79년 10.26사태(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를 비롯 같은 해 12월 12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선포, 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항쟁 등을 겪으면서 또 한 차례의 신문 검열을 받아야 했던 70, 80년대의 언론계는 시련의 연속 그 자체였다. 

암울했던 당시 시대상황은 기독교(교회)와 기독언론에 적어도 두 가지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영혼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되어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주요 논제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와 기독인들이 난국 극복을 위해 기도와 결속이 필요하다는 자각 아래 함께 모여 기도에 힘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1973년 5월 20일) 교계 일각에서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이 발표됐다. 이 선언은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면서 “복음은 구체적인 역사현장에서 선포돼야 한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1974년 11월에 발표되었던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과 1988년의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선언’ 등은 이 선언서를 참조하여 작성된 것이다. 이 선언이 ‘크리스채니티 앤 크라이시스’라는 해외 기독교잡지에 수록되었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했다. 

1984년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어느 때보다 크고 의미 있는 행사들이 펼쳐졌다.
1984년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어느 때보다 크고 의미 있는 행사들이 펼쳐졌다.

또 한 가지, 70, 80년대가 어두운 정치·사회적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화(전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만한 일이다. 1972년 4월 25일에는 한국군 역사상 최대 규모로 장병 3,478명의 진중 합동세례식을 비롯해 전군 신자화운동이 활기차게 전개됐다. 73년에는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레함 목사 초청 전도대회가 개최되어 연인원 수백만 명이 운집,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어서 74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엑스플로 74’ 대회, 77년도의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 대규모 복음화 운동이 일어나 전도운동에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 사회가 새로운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각 교단적으로는 1만 교회 운동, 5천 교회 백만 신자 운동, 교단발전 10계년 계획 등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70년대의 세계 교회도 대규모 선교대회를 통해 세계 복음화에 힘을 실었다. 이 시기 세계선교대회는 개인(영혼)구원과 사회구원 중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두느냐의 문제도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을 뜨겁게 달궜던 세계선교대회가 태국의 수도 방콕과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다. 1972년 12월 29일부터 1973년 1월 9일까지 12일간 방콕에서 개최된 ‘오늘의 구원을 위한 세계대회’는 구원논쟁에 불을 붙였다. 

복음주의자들을 주축으로 1974년 7월 16일부터 25일까지 10일간 스위스 로잔에서 제1차 세계선교대회가 열려 개인(영혼) 구원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복음주의와 존 스토트에 의해 초안된 ‘로잔언약’에 나타난 선교신학은 사회적 행동과 관심의 복음전도에 있어서 필수적임을 확인하면서도 교회의 사명 가운데 복음전도가 가장 중요함이 강조됐다. 로잔언약은 “예수 이름 외에 우리가 구원받은 다른 이름은 없다”고 명시하고, “구원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80년대는 한국 교계가 ‘통일운동’을 선교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던 시기로 평가된다. 1980년 3월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가 “통일이 교회의 선교적 과제임”을 천명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2년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설치,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1986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총회에서 ‘신앙고백서’를 통해 “분단이 지속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관심은 1988년 2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으로 이어진다. 이 선언은 평화통일을 위한 신학적·정책적 입장과 함께 통일을 위한 민간 기구의 활동 보장 및 남북한 경제, 학술, 예술, 종교의 교류 등 구체적 통일 과제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 ‘88선언’은 기독교 보수진영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88선언의 민족주의적 낙관론, 미군철수, 남한사회와 남한교회의 분단책임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통일문제에 대한 이 같은 입장 대립은 1970년대 이후 전개된 선교신학의 차이와 더불어 북한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진보진영에서는 한국의 반공적 기독교가 통일의 길을 차단해 왔다고 비판한 반면 보수진영은 기독언론의 반공활동을 국가안보를 위한 중요역할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두고두고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통일문제에 있어서는 세계 교회 및 해외 교포교회와의 연대를 통한 접근이 주목받게 된다. 이같은 움직임은 1984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 문제 연구위원회가 일본 도잔소에서 개최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 이른바 도잔소 회의로 귀결된다. 이 회의는 한국교회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을 초청하는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도잔소 회의는 이후 86년 남북 기독교인의 첫 만남이 이뤄진 ‘글리온 회의’와 광복 50주년인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지키기로 선언한 88년 2차 글리온 회의, 그리고 1990년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 등으로 그 정신을 이어갔다.

89년 12월에는 기독교 각 교단장들이 모여 남북교류를 일원화 하기 위한 ‘한국기독교남북교류추진협의회’를 구성, 통일 운동과 북방선교를 향한 범교단적 활동에 시동을 걸었다. 80년대의 하이라이트는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을 기념한 1984년 행사들이다. 이 해는 어느 때보다 규모가 크고 의미 있는 행사들로 가득 채워졌다. 백주년 선교대회를 비롯하여 세계기도성회, 사랑의 실천운동, 세계기독선교대회, 신학자회의, 각 교단의 기념관 건립 등이 그것이다.

9개 지방 선교대회로 축제를 펼치고 연인원 수백만 명이 여의도공원에 모여 감사와 회개, 민족통일과 평화를 염원하면서 교계의 화해와 일치를 다짐했다. 하지만 선교 백주년을 맞은 한국교회의 역량으로 보아 아직도 교회의 일치(연합)에 대한 실질적 계기가 마련되거나 결과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70,80년대 기독언론은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복음선교의 비전과 교회 갱신·일치, 신앙의 생활화를 위해 노력했다. ‘사실을 진실 되게’ 교회 안팎의 뉴스(정보)를 전달하려고 힘썼고, 해외교회 통합, 이단·사이비 종파에 대한 규탄과 재일동포들의 인권문제에 이르기까지 과감하게 보도함으로써 국내외에 파장을 던져주기도 했다.

특히 재일동포의 인권문제는 기독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73년 8월 일본 히다찌 제작소 공원 모집에 한국인 교포 박종석 씨가 민족차별에 의해 입사를 거절당한 사건 보도가 기독언론을 통해 국내외의 여론 환기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히다찌 회사는 그해 5월 재일 한국인 차별을 시인하고 박 씨를 1970년까지 소급하여 입사시켰고, 그동안의 봉급과 위자료를 지급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박 씨가 인권회복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기독언론의 쾌거였다. 

70, 80년대에 비해 오늘의 언론환경은 놀라울 만큼 달라졌다. 하지만 과거엔 생각지도 못했던 도전들에 직면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뉴미디어의 등장이 그중 하나다. 말 그대로 ‘미디어의 혁명’이 시작된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이에 뉴미디어·다매체 시대 속에서 기독언론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미래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기독언론이 위기의식을 갖고 명심해야 할 것은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는 언론은 도태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임팩트’도 없고 ‘눈길’이 가지도 않으며 ‘울림’이 없는 기사는 외면당하기 될 것이다. 지령 1500호를 맞는 기독교연합신문은 과장이 아닌 사실을, 흥분이 아닌 열정으로 한국교회와 역사를 기록해 나아가야 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1500호의 지평을 향해 달려가는 기독교연합신문에 한국교회의 기도와 격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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