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발발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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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의 원인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9.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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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30년 전쟁(1)

종교개혁 시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끝없는 갈등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들, 특히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올 더 무서운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종교 전쟁 가운데 가장 처참하고 가장 긴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30년 전쟁(1618~1648)이었지요. 이 전쟁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종교개혁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1555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맺었던 아우그스부르크 강화조약이 겨우겨우 약속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이 가톨릭과 루터교도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개신교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고, 각 지역 통치자들이 자기 구역의 종교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분명히 아우그스부르크 조약에는 보류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몇몇 지역에서는 주교나 영주가 개신교로 개종하더라도 여전히 그 지역은 계속 가톨릭으로 남아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정황은 어느 때라도 한 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을 밀어붙이는 분위기였습니다. 이 불안한 평화 속에서 크고 작은 종교적 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런 상태로 50년 가량이 흘렀습니다. 

그러다 1606년 도나우베르츠라는 황제 직할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 안에서만 그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는데 수도사들이 수도원 밖으로 행진해 나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돌을 던지며 이들을 다시 수도원 안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는 이 도시에 인접한 바바리아의 영주 막시밀리안입니다. 바바리아는 강력한 가톨릭 지역이었습니다. 이 사건 후 일 년이 지나 막시밀리안이 군대를 거느리고 도나우베르츠에 나타났습니다. 황제 직할시는 당연히 황제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면서 시민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주민들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종은 커녕 ‘복음주의 동맹’을 결성하여 대항하였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신성 동맹’을 만들었습니다. 언제고 두 파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질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교황과 황제의 지원을 받는 데 비해서 ‘복음주의 동맹’은 개신교 전체를 포함하지 못한 채 단지 루터교도들로만 이루어진 약점이 있었습니다.

보헤미아에서도 그 갈등이 심했습니다. 이 지역은 존 후스 시대부터 개혁의 정신이 강했던 곳으로 주민의 90퍼센트는 칼뱅주의자였습니다. 황제가 볼 때 여기 주민들은 가톨릭도 루터파도 아닌 이단들이었습니다. 페르디난드는 국왕이 되자 이 지역의 이단을 뿌리 뽑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가 멸시당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내 몸이 찢어져 죽는 것을 택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을 아주 잔인하게 다루었습니다. 주민들은 즉각 반발하며 프라하로 몰려갔습니다. 그리고 왕실 위원회에 항의하였습니다. 모든 진정이 허사로 돌아가자 이들은 항의를 듣던 왕의 신하들을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30년 전쟁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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