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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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 이성중 기자
  • 승인 2019.09.04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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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민족 목회자’ 동호 신홍식 목사

민족 목회자로 알려진 동호 신홍식 목사는 부친 신기우 씨와 모친 최살랍 씨 사이에서 1872년 3월 1일 차남이자 서출로 출생했다. 그의 출생지는 충북 청주다.

총명하였던 그는 한시도 잘 지어 대재(大才)라는 칭찬 속에 한학 공부에 열중하는 가운데 16세에 부친을 여의고 오로지 과거만이 자신을 입신양명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지만 갑오경장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됐다. 

그는 이후 장사 등을 통해 생계를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그의 생활은 나날이 피폐해져갔다. 그러던 중 30세가 되던 해(1901년 추정)에 기독교에 입교했다. 하지만 그의 입교는 교회의 권세를 이용, 토색을 위한 불순한 의도로 입교하게 되었다는 것이 후에 알려지기도 했다.

반면 입교 후 신홍식은 1903년 부인 박씨(김 나오미)가 설립한 청주읍 북 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그는 성경을 읽고 상고하는 중에 하나님의 존재도 알게 되었고 인도(人道)도 찾아냈으며, 정의(正義)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 신홍식 목사

부흥사로 역사학자로 문필가로 능력

성경을 통해 변화의 삶을 체험한 신홍식은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1913년 제2회 졸업생으로 졸업했으며, 그는 이후 보은 구역에 파송된 이후 입장, 목천, 직산, 진천, 연기 등 충청도 여러 지역에 파송되어 성실하게 목회했다. 이후 공주읍(현재 공주제일교회)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부임후 신홍식 목사는 신령한 목사로서 하나님의 신유의 역사를 나타내기도 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의 목회 활동을 통해서 충청도 초기 교회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후 신홍식 목사는 1917년 관서지역 대표교회인 평양 남산현교회에 부임해 목회를 감당했으며 1922년 초 인천내리교회에 부임, 부흥사로 역사학자로 문필가로 능력을 인정받아 교단과 지역을 넘어 홍성, 전주, 군산, 서울 등 여러 지역에서 미 감리회의 명성 있는 부흥사로서 활동하는 등 왕성한 목회 활동을 감당했다.

그는 감리교 목회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감리사로 임명받아 원주지방 감리사 겸 강릉지방 감리사로 활동하게 되며 특히 원주지방 감리사는 은퇴하기까지 계속하여 시무했다.

3.1독립운동 참여, 옥고

신흥식의 3.1독립운동 참여는 손정도 목사를 통해서 이승훈 장로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서명한 데 그친 것이 아니다. 평양 지역에서의 감리교회 독립 운동을 준비하는데 막후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으며, 독립선언서 발표 이후 태화관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 신홍식 목사는 3.1 독립운동 재판 과정 내내 당당한 진술을 한 일화로 유명하다. 

재판 후 경성감옥에서 형기를 마친 신홍식은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소 후 평양역에 도착하였을 때 엄청난 평양시민들이 그를 환영했다고 장녀인 신애라가 증언했다. 

▲ 그는 평양 기훌병원에서 3.1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후기 목회활동과 기독교민족운동

출소 후 신홍식 목사는 기독교민족운동인 절제운동, 청년운동, 농촌운동을 각각 전개했다. 절제운동의 경우 기독교 입문 이전 방탕한 삶을 살았던 그가 1912년 미 감리회 조선연회에 절제위원회가 창립될 때부터 절제 위원으로 꾸준히 참여하면서 목회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벌이게 되었고, 특히 1920년대부터 파멸로 치닫고 있는 조선 민중을 살리고자 전개된 금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청년운동의 경우 감리회 청년단체인 ‘엡윗청년회’라는 통로를 통해서 민족 사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마지막으로 농촌운동은 1928년 미 감리회에 농촌부가 조직된 이후 그가 시무하던 원주지방 및 강릉지방도 미 감리회 조선 연회의 결의대로 농촌부를 조직하게 됐다. 특히 그는 농촌 계몽운동을 통해 원주지방 및 강릉지방의 감리사로 시무하면서 야학을 포함하여 수처의 교육기관을 설립했지만 현재는 그가 세운 교육기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자원은퇴와 흥업 구락부 사건

한편 신홍식 목사는 낙향이후 행적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진 것은 그가 자신에게 찾아온 병마와 싸우는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는 정도이다. 하지만 낙향 이후 병마 이외에도 의외의 사건으로 신홍식 목사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20~30년대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에는 기호파 세력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이승만의 동지회계인 흥업구락부건이 일제에 의해 1938년 적발되면서 이와 관련된 많은 이들에 대한 검거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마찬가지로 청주에 낙향해 있던 신홍식도 흥업구락부원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신 목사의 경우 목회 현장을 떠나 자연인으로만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감리회보’에 보면 그는 감리사 시절부터 급성 풍단병으로 고생한 이후 계속해서 병환에 시달려 왔으며,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음에도 경찰서에 연행되지 않고 집에서 조사를 받는 등 어떤 면에서는 그의 병이 유익한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홍식은 흥업구락부 사건이 일단락된 직후인 1939년 3월 18일 청원군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그는 유언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 하라”는 짧막한 말을 남기고 소천했다.

민족목회자였던 신홍식 목사는 3.1독립운동을 비롯해 다양한 기독교 민족운동을 전개한 소위 민족목회활동을 펼친 데에는 그 자신의 민족목회에 기인하고 있다. 그 이유로 첫째는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줄 대안으로 ‘기독교’를 제시하고 있으며, 둘째는 기독교의 가장 궁극적인 가치는 천국에 있는데 신홍식은 내세의 천국이라는 전통적인 틀을 뛰어넘어 현세에서 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셋째, 그의 기독교민족운동은 막연하게 전개된 것이 아니라 특징적으로 ‘청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확정적으로 가리키자면 그 청년은 ‘기독청년’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청년’은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줄 메시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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