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독립운동 병행, 그에게는 소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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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독립운동 병행, 그에게는 소명이었다
  • 이성중 기자
  • 승인 2019.08.30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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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조선의 자유를 꿈꾼 최성모 목사

평생의 스승 전덕기 목사와의 인연

최성모 목사는 1874년 경성부 북부 안동(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출생했다. 유교 집안이었던 최성모가 기독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31세가 되던 해인 1905년 친구 이필주와 함께 우연히 남대문로의 상동교회 앞을 지나다가 교회 입구에 걸려 있는 시국대강연회 포스터에 이 끌려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전덕기 목사의 시국강연을 듣고 큰 감화를 받은 그는 마음의 변화를 느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최성모는 전덕기 목사의 강연을 듣고 충격을 받아 즉시 상투를 잘랐으며 이튿날부터 상동교회에 출석해 신앙생활을 했다.

▲ 3.1운동으로 체포 투옥된 최성모 목사. 그는 회심 후 기독교 독립운동의 선봉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맡는다.

그는 1908년 세례를 받고 감리교회에 입교했으며, 1912년부터는 서강교회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설교는 웅변이 있고 해학이 섞인 이야기로서 젊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감명 깊은 말씀으로 들렸으며 젊은이들에게 꿈을 넣어주어 그의 설교를 듣고 일본으로 공부를 떠난 청년이 4~5명이나 될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활발한 교회활동을 눈여겨 본 전덕기 목사는 최성모에게 상동교회 기도회 인도와 교회에서 운영하던 상동청년학원 및 공옥학교의 대외교섭 문제를 맡겼다. 그는 전 목사의 권유로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서대문밖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13년 3월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북 감리교 목사가 됐다. 더불어 최성모는 1913년 일제가 유신회라는 어용단체를 동원 YMCA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온 몸으로 막아낸 주역의 한명으로 민족적 행보가 뚜렷했다. 또한 그는 1914년 4월 개성 한영서원에서 열린 조선기독교 청년연합회  조직 총회애 중앙청연회 대표 자격으 로 참여하는등 민족적 행보를 이어갔다.


3·1선언 소식 듣고 적극 동참

이처럼 민족적 행보가 뚜렷한 최성모가 3.1혁명에 동참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으로 1919년 2 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로부터 독립선언에 관한 계획을 전해 듣고는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한편 2월 8일 동경에서 YMCA를 중심으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을 때 박희도를  해 소식을 들은 최성모는 서울YMCA를 드나들던 강기덕, 한위건, 김원벽 등과 함께 본격 모의를 시작했으며, 더불어 민족대표 구성 과정에서 감리교 를 대표해 장로교의 이승훈과 함께 기독교측 실무를 담당했다.

2월 26일 그는 이승훈을 비롯해 6명의 기독교 측 대표들과 비밀 회동을 했으며, 이들은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에 서명, 날인할 기독교 측 대표를 뽑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1907년 전덕기 목사의 강연에 감동을 받은 이후 10년 이상 기독교 구국운동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3·1 운동 참여는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크고 소중한 일이었다.

3·1 운동 이틀 전인 27일 그는 정동제일교회내에 있는 이필주의 집에서 기독교 측 대표들과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한 후 기독교 측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했다.


3·1 운동 만세후 투옥 2년여 옥고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후 최성모를 비롯 한 민족대표들은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그는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2년 8개월을 선고받고 마포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최성모는 경성감옥에서 재판과정에서도 “사람은 인도, 정의, 장에서 생존하는 것인데 우리 조선 사람은 자유가 없으며 저작, 여행 등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언론과 교육의 자유도 없다”고 진술했다.

또한 그는 “조선에는 고등보통학교만 있을 뿐 기타 중학도 없으며 대학도 없는 것은 일제가 조선 사람을 완전히 예속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 분명하다”며 일제에 대한 항거 의지를 분명히 하기도 했다. 2년 8개월의 옥고를 마친 최성모는 1921년 11 월 4일 친구인 이필주 등 17인과 함께 만기출옥 했 으며 그는 곧바로 선교 일선으로 복귀했다. 선교사시절 처음 몸담았던 서강교회를 시작으로 상동교 회에서 2년간 시무했다.


목회 활동 열중…만주에서 전도사업도

특히 서강교회의 교인들은 최성모가 부임하자 그를 크게 환영했다. 최성모는 서강교회 담임목사 부임 후 1년 후에는 북감리교 연회에서 다시 상동 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더욱이 상동교회는 전덕기 목사의 유지를 가장 분명하고 선명하게 계승한 인물이기에 교회는 그를 더욱 더 환영했다. 최 목사 부임후 전덕기 목사 때의 전성기를 누리지 못했지만 당시 상동교회는 1,650명의 교세를 자랑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한편 최성모는 1924년 상동교회를 떠나 만주 봉천(현 심양)으로 임지를 옮겨 그곳 십간방 교회에서 선교를 했다. 또한 그는 봉천 선교시절 그는 목 회와 독립운동을 병행했다는 증언도 함께 나와 옥고 후에도 대한제국의 독립에 온 힘을 쏟은 것을 알 수가 있다.

귀국 후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경기도 수원에 서 병 치료를 하며 요양하다가 1936년 3월 22일 63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 통령장(2등급)을 추서했으며, 묘지는 지난 2005 년 10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3묘역 290호) 됐다. 한편 감리교신학대는 1978년 그를 포함해 이 대 학 출신 민족대표 6명의 흉상(부조)을 교내에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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