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2000년이여! - 김경원목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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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2000년이여! - 김경원목사(서현교회)
  • 승인 2000.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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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2월이다. 세월이 이렇게 빠를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속도감이 빨라진다고 한다. 즉 40대에는 세월이 시속 40km로 느껴지고, 50대는 50km, 60대는 60km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세월이 더 빨리 느껴지는 것을 보니 나이가 점점 들어간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금년 2000년은 유독 그렇게 느껴진다.

작년 이맘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었다. 흔히 대망의 2000년, 새로운 천년이라고 야단들이었다. 엄청난 기대감과 더불어 컴퓨터의 오작동(00년 인식 오류)으로 큰 재난 사고가 일어날 염려가 많았다. 그래서 온 세상이 비상식량 사재기를 한다고 난리를 쳤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그저 같은날, 같은 해의 반복으로 여전했다. 아무 재난도,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동시에 새로운 천년 2000년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희망을 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고 각오도 만만치 않았다. 전 세계의 TV는 새 천년의 첫 시간을 알리는 온갖 축제로 시작했다.

그런데 1년을 결산할 시점에 와서 보니 별 것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나라의 경제적 침몰로 희망보다는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또 신앙세계도 별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했다.

세월을 아껴야

전도자의 말같이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헛된 세월을 보낸 느낌이다. 새삼스럽게‘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이 말은‘속량해 낸다’(Exagorazo-Redeem)는 뜻이다. 즉, 시간을 가치있게 보낸다, 시간과 세월을 허송하거나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살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늘 후회가 된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1년 3백65일을 낭비할 때가 많다. 하는 일 없이 또는 좋지 못한 일에 전심전력하게 되어 돌이킬 수 없는 후회스러운 시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연말에 후회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이 어디 나 혼자 뿐이겠는가?

옛날 희랍의 조각가 Lysipus(BC. 360)가 동상 하나를 만들었다. 그 모양은 날개가 있으며 앞부분만 머리털이 있고 뒤는 대머리였다. 그 동상 아래에 글이 쓰여 있는데 이러하다고 한다.

그대 이름은? - 기회 왜 팔에 날개가 있나? - 잽싸게 날아가려고 왜 앞에 머리털이 있나? - 내가 오는대로 사람들이 붙잡도록 하게 하기 위해 왜 뒤가 대머리인가? - 뒤에서는 잡을 수 없다.

어디에 소망을 둘 수 있나?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리 밝지 못하여 우리를 참담하게 하고 허망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경제여건 때문에 그렇게 느낀다. 왜?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른다. 기업의 쇠퇴, 실직, 부도, 노숙자들의 증가, 명퇴니 조퇴니 하여 직장를 잃고 머리를 숙인 가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뿐만 아니라 도덕적 환경도 그러하다. 온갖 부도덕이 난무한다. 러브호텔이니 원조교제니 하여 퇴폐적 환경이 많다.

신앙적 환경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교회의 침체국면을 맞이했다. 삶 자체가 한숨이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온갖 환경이 좋아도 근본적으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허망한 것이며 모든 것을 다 누려도 만족이 없기에 허무하다.

솔로몬의 고백이 있지 않은가? 그는 왕이며 특히 지혜의 왕으로 부귀와 영화를 다 누렸다. 그래도 그는 말년에 헛되다고 표현했다. 끝없이 새 것을 추구하지만 해 아래 새 것이 없기에 허망하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삶이 결코 허망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적어도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 속에서 주어진 믿음에 따라 살고, 주어진 사명을 따라 살며, 최선을 다하면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소망이 있으며 기쁨과 환희가 넘치게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의 불변하심을 믿고 그분만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시며 힘이 되신다. 이 한 해가 저문다. 새 천년이 무엇인가? 큰 기대에서 출발했으나 이루어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이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변하는 세월 속에 변함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굳게 하며 예수만 바라보고, 오늘의 환경을 이기고 오늘의 허무감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내다보고 또 힘있게 전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십일조 논쟁이 주님의 사역자들 간의 일이었다는 것 자체가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논의라기보다는 정체성이 결여된 논쟁인 것 같아서 평신도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고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적은 부분만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교만한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대한 진리의 전에서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성경적 방법에 대하여 비평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 추측이나 어긋난 점을 찾아 함부로 비판하되 마치 도마 위의 생선을 닥치는 대로 난도질하듯 성경을 흠집 낸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요21:24,25).

어느 선배 학자는“성경의 난점(難點)이야말로 다름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서명(署名)이다”라고 했다. 우리의 온전함은 지적 달성보다 도덕적 자질에서 발견되기를 힘써야 한다. 지적 오류에 빠지면 지나친 비판주의적 바리새인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다. 교회 성장의 둔화와 답보 상태가 한국 교회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정체현상의 원인은 번영신학의 상승에서 결과된 영적성장의 침체에서 나타난 기갈현상, 기복신앙의 광신에서 빚어진 십일조와 각종 축복헌금 강조로 물량주의화 된 것, 그리고 구미 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십일조 무용론 내지 십일조를 연보로 변역시키려는 진보주의가 빚은 모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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